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 승인 2020.05.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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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오월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동감 넘치는 삶의 자세를 배우게 한다. 찬란한 봄의 기운을 받아 연록에서 진록 빛깔로 우럭우럭 잎들을 키워가는 플라타너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다가올 여름의 격정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공해에 찌들어 시커멓게 변한 가지 끝에서도 푸른 잎들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 커다랗고 무성한 잎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5월의 파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란 하늘에 젖어있다”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가 문득 생각난다. 꿈이란 자신이 존재하고픈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는 어떤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너의 꿈은 뭐지 아니 내 꿈은 뭐였지’ 되물어 본다.

‘세상 모든 여자의 꿈은 혼자 여행 가는 것’이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혼자만의 여행, 그것은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혼자만의 긴 여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여자의 꿈도 그랬을 것이다.

바람에 뒤척이는 풍경소리처럼 미용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마치 티베트의 깊은 산사에서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의 정신처럼 청정하게 울려 퍼진다. 그곳에 가면 미용실이라기보다 마치 북·카페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든다.

각종 미용 재료와 화장품 샘플보다 더 많은 책이 빼곡히 들어찬 미용실에는 그녀가 사서처럼 보인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길이 일순간 박자를 놓친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어서 오세요.”라고 잠깐 인사를 건네고는 망망대해에서 겨우 건져낸 시적 영감이 도망이라도 칠세라 허둥지둥 놓친 펜을 다시 잡는다. 두어 평 남짓한 바닥엔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이 탈곡을 마친 볏단처럼 수북이 쌓여있고, 오래된 빗자루가 귀퉁이에 기대선 채 숨이 넘어갈 듯 붙어 서 있다.

손님을 대하는 상냥함보다 글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손님에게 오히려 알 수 없는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미용실을 찾는 누구 하나 그런 그녀의 태도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꿈은 시인이었다. 생계를 위해 열었던 미용실 이였지만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그녀는 모든 시간을 시에 집중시키고 있다. 미용실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푸른색 칠판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에는 손님들의 예약 스케줄보다 시구들이 더 빼곡하다. 미용 화보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빛이 바래고 투명유리로 된 탁자 위에는 잡지를 대신한 시집이며 문학 평론집, 끄적거리다 만 글귀들이 완성을 꿈꾸며 빛나고 있다.

여자의 삶에서 가족과 생계 문제를 뒤로하고 꿈을 좇는다는 것은 특별한 외출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꿈을 꿀 수는 있지만 이루기는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가부장적 사고가 강한 이곳에서 여자의 꿈이란 늘 싸다가 만 여행 가방과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에 매진하는 그녀가 무척 예뻐 보인다. 잠시 그녀가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손님들은 시를 읽고 인문학책을 뒤적거린다. 미용실인지 도서관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이 미용실의 특별함이 되었다.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기대되는 삶, 꿈을 꾸는 일에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 되물어 본다. 시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그녀, 작가의 꿈을 이루려는 그녀의 지치지 않는 도전에 찬사를 보낸다.

빈 종이로 두는 것과 뭐라도 쓰는 것, 그냥 제자리에 서 있는 것과 한 발자국이라도 떼는 것은 처음엔 비슷해 보여도 나중엔 많이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열 개의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으며 힘들고 막막할 땐 ‘한 줄만이라도 쓰고 한 걸음만 떼자’ 이 마음이면 될 것 같다. 그다음, 이 한 줄과 한 걸음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기대하면서 천천히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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