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네스코 등재·국제브랜드화 추진해야”
“3·1운동, 유네스코 등재·국제브랜드화 추진해야”
  • 정은빈
  • 승인 2021.02.2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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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재단, 공론화·자료 발굴
日 ‘위안부 등재’ 방해에 주춤
세계사적 유례 없는 저항 운동
시위 인원 200만·규모 2천회
세계 약소민족 독립에 큰 영향
태극기와31절
28일 오전 한 시민이 대구 중구 ‘3·1만세 운동길(90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 길은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대구의 학생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이동했던 길로 전해진다.
정은빈기자

올해 102주년 3·1절을 맞았으나 3·1운동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 보류 여파로 주춤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3·1운동 기록물의 경우 생존 독립운동가가 최대한 남아 있을 때 등재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작년 독립유공자 평균 연령은 95세에 달했다. 독립유공자 유족의 평균 연령도 77세가 됐다.

조성구 3·1운동 UN유네스코등재 기념재단(이하 3·1운동 기념재단) 사무총장은 28일 “유네스코 본부가 현재 기록유산 등재에 관한 모든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그동안 유네스코 운영비의 40%가량을 납부한 일본이 아시아 여러 국가가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등재하려 한 일을 계기로 회비 납부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면서 “올해 코로나19가 다소 진정되면 문화재청이 관련국들과의 회의를 통해 등재에 관한 사항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중국 등 8개국 14개 기관으로 구성된 ‘국제연대위원회’와 영국 임페리얼 전쟁박물관은 2016년 5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2천744건에 대한 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지만, 유네스코는 2017년 등재를 보류했다. 유네스코 최대 후원국인 일본이 2016년 10월부터 분담금 납부를 연기하면서 등재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등재 보류 후 기록유산 사업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의 경우 한일 간 대화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마련했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대화 회피로 국가 간 논의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본은 1940년대 한국인들이 대규모로 강제 징용을 당한 군함도를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등 역사 왜곡 논란을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3·1운동 기록물의 기록유산 등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17년 12월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3·1운동 기념재단은 미국 LA, 베트남, 필리핀, 미국 워싱톤 등에 지부를 잇따라 발족하고 공론화 과정을 밟고 있다. 2019년 9월에는 한국역사연구회를 통해 1919~2018년 국·내외에서 작성된 3·1운동 관련 기록물을 정리한 ‘3·1운동 기록물 목록화 및 관련 국내 기관·단체 현황 정리’ 자료를 공개했다.

3·1운동 기념재단은 이 자료를 토대로 기록유산 등재에 필요한 과제를 발굴하고 연구할 계획이다. 조 사무총장은 “국·내외 포럼을 개최하고 해외 지부와 국내 일간지 등으로 홍보해 숨겨진 자료들도 추가로 발굴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장기간 대규모 항쟁으로, 그 가치를 입증할 만한 많은 자료들이 일본과 한국, 미국, 영국 등지에서 생산됐고 현재 소장돼 있다”면서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국내외에 보급해 국제브랜드(brand)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1일 서울과 이북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3·1운동은 8일 대구, 10일 광주와 강원도 철원, 21일 제주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시위 규모는 2천회 이상, 참가 인원은 2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특히 ‘비폭력’, ‘대중화’, ‘일원화’라는 3·1운동의 정신은 중국 5·4운동과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 등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역사연구회는 3·1운동 가치에 대해 “3·1운동의 의의는 비단 한국근대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한 운동으로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웠다”라며 “3·1운동은 좁게는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한 운동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 지배의 종말을 요구한 혁명적인 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은빈기자 silverbi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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