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 서툰 사내가 써내려간 애잔한 생의 고백
[백정우의 줌 인 아웃] 서툰 사내가 써내려간 애잔한 생의 고백
  • 백정우
  • 승인 2021.05.27 21: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정우의줌인아웃
 엄태구는 영화 '낙원의 밤'에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대체불가의 연기를 펼친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걸출한 신인배우를 만나는 일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이 갖는 특권 가운데 하나이다. 2010년 겨울도 그랬다. 그러니까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매일 10편 이상을 눈에 진물이 나도록 보던 중 한 편의 영화에 시선이 꽂힌 것. 정확히는 주연배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름은 엄태구. 독립단편영화 ‘유숙자’의 주인공이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젊은 여성이 기거하는 아파트에 들어가 집안 어디선가 잠을 자고는(여성의 침대 밑이다) 집주인이 출근하면 자신도 집에서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는 사내의 이야기다. 짧은 단편에서 엄태구는 대사 없이 오직 몸으로만 연기한다. 공허한 눈동자와 불안한 표정만으로도 화면을 지배한 그였다. 영화를 보는 순간 물건이라고 직감했다. 기대주, 미완의 대기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봉인이 풀리길 기다리는 날것에 가까웠다.

엄태구의 진가를 확인한 건 ‘밀정’에서였다. 송강호를 감시하는 일본경찰을 맡아 성실하게 스크린을 종횡했다. ‘택시운전사’의 검문소 계엄군으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엄태구는 조폭영화의 외피를 입은 누아르 ‘낙원의 밤’에서 조직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조직에 배신당해 타깃이 된 중간보스를 연기한다.

대체로 이런 유의 영화에는 장르적 클리셰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사적 복수를 촉발시키는 비극적 사건과 생의 끝에서 만나는 헛된 희망이 그것이다. 둘 다 죽거나 어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둘 다 살면 재미없으니까) 필연적 죽음의 서사. 새로울 것 없는 빤한 플롯에 윤기를 더하는 것이 배우의 연기라면, 엄태구는 장르 도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자기만의 인장을 선명하게 새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조폭의 신파극은 세상에 널렸다. 분에 넘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바칠 것이 목숨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낙원의 밤’은 다른 길을 간다. 죽음을 앞둔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사내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의 순간을 처연하고 집요하게 보여준 감독은 남겨진 여자의 부채의식이 복수심으로 전이되어 마침내 절멸의 천사가 횟집에서 벌이는 장대한 학살극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리고……. 이 모든 플롯의 견인차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대체불가의 연기를 펼치는 엄태구이다.

근래 만난 가장 슬픈 조폭의 모습을 나는 엄태구에게서 본다. 그것은 이전까지 유사한 캐릭터를 연기한 선배들 즉 박중훈의 용대와 한석규의 막동이와 조인성의 병두와 다르고, 이병헌의 선우와도 완전히 다른 형상이다.

독사 같은 눈빛과 예측불허의 날렵한 몸놀림과 불길한 목소리를 장착한 엄태구는 누아르 장르에서 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조직이 정한 선과 규율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모범적인 태도이면서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었던 거칠고 투박한 사내의 순정이다. 어차피 죽을 거니 같이 자자는 여자의 제안에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며 방을 나가면서도 시건장치를 꼼꼼히 확인하는 남자. 벼랑 끝에 선 서툰 남자가 써내려간 애잔한 생의 고백 ‘낙원의 밤’. 지상의 마지막 밤에 잠 못 이루던 사내의 뒷모습이 훅하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