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처방전
[달구벌아침] 처방전
  • 승인 2022.04.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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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현관문을 열고 가족들이 나가는 순간, 비로써 내 삶의 하루에 채널을 맞춘다. 방마다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세탁기 속으로 던져 넣고 땟국의 정도에 따라 코스를 선택한다. 식탁 위, 음식 찌꺼기들이 눌어붙어있는 그릇들의 많고 적음에 알맞게 세제를 풀어 씻고 헹구기를 반복한 후 닦고 말린다. 또한 밤새 쏟아져 나온 쓰레기들을 분리수거 하는 것으로 청소는 끝이 나고 온전한 내 하루의 시작이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던 와인버그 박사가 흥미롭게도 "당신이 사는 공간은 여러 나라의 수십 개 방송국에서 송출한 수백 가지 전파로 가득하다. 그러나 당신은 그 가운데 단 한 가지만 청취할 수 있다. 나머지 전파들은 그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다가 채널을 돌리는 순간 현실로 나타난다."고 라디오 방송에 비유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주전자에 찻물을 올리고 라디오를 켠다. 즐겨듣는 방송 주파수에 채널을 맞춰본다. 세상사는 이야기며 장르를 불문한 음악들이 쏟아져 나온다. 무엇에 집중하고 어떤 것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할지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오만가지 생각 중 나는 글을 쓰는데 채널을 맞춘다. 글을 쓰는 동안 내 속의 깊은 상처들과 만나게 된다. 꿈에서조차 생각하기 싫은 일들을 다시금 꺼내 기억하고 선별한 후 재해석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과 가족, 좀 더 나아가서는 타인의 상처까지 이해하고 보듬어 안으려 애쓰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오히려 더 큰 위로를 받게 되는 듯하다. 하물며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도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나누며 이해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측은지심을 가지는 마음이라 했던가. 글을 쓰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데,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늘 마음이 아프고 속이 쓰리다. 하지만 하나씩 꺼내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쓰고 나면 그제야 그 상처들에 대한 미안한 맘을 덜어내게 되는 보상심리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몇 해 전, 시어머니는 십 수 년째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남편과 결혼 후, 서른 해를 사는 동안 거의 반이 넘는 세월이었다. 먹지도 말하거니 듣지도 못한 세월을 그렇게 자리보전하다가 떠나신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며 우는 것조차 자식으로서 죄가 된다며 맘껏 울지도 못하던 남편의 모습이 가끔 봄날이면 불쑥불쑥 쑥부쟁이처럼 피어난다. 언젠가, 그런 어머니의 얘기를 글로 써서 남편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읽어가는 내내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글을 쓴 원고지를 내게 툭 던지며 "엄마~"하고 큰 소리로 부르더니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의 등만 쓸어내리다가 이불을 덮어주곤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문밖까지 흘러나오는 그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글쓰기는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시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남편의 그리움, 남편을 통해 보게 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나의 그리움까지 나만의 연민을 담아 기록하는 일이다. 배고픔도 외로움도 참을 수 있는데 그리움만은 참을 수 없이 끓어오른다. 글을 쓰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한 추억의 채널에 맞춰 고정하고 싶다. 누워계신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남편의 그리움도 위로해 줄 수가 있다. 가끔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깨워 파전에 동동주 한 잔 거나하게 마시기도 한다. 이렇듯 내게 글을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그리움을 잠재우는 처방전이며 내 상처의 주치의다.

오늘 하루 봄꽃들도 제각각 다른 모습과 색깔과 향기로 피는 걸 보면 우리의 날들이나 마음속도 수천 개의 채널로 되어있지 않을까. 잘 닦인 포장도로를 지날 때와 울퉁불퉁한 비포장 골목길을 걸을 때 느끼는 감각은 사뭇 다르다. 누구나 이런 길을 번갈아 걷기도 하고 이와 같은 시간을 통과하며 목적지에 이를 것이라 여겨진다. 한껏 흔들리고 넘어지다 결국 다시 땅에 발을 딱 붙이고 걸어야 하는 시간은 이어질 테다. 너무 오래되었거나 많이 들어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더는 늘어지지 않게 잘라낸 후, 봄날의 생기를 불어넣어 본다.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내가 꿈꾸는 미래는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향해 전파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그런 가능성으로만 남겨둔 채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채널을 돌리는 순간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기를 꿈꾸어보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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