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퍽퍽합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모난 가슴 풀어헤친 편백나무
툭툭 건드려 보는 발끝에서
초록별의 얼굴이 방긋거립니다
한때는 수 백 번이었을 맹세가
불현듯 가벼워질 때가 된 것일까요?
담백한 그대가 그립기 시작합니다
지나간 길 하늘 활짝 열어젖히려고
마디 선명한 잔가지를 두드려주는
바람의 순한 연주를 듣습니다
얻은 게 많아서 버릴 것 또한 많다는
내가 나를 부르다가
덩달아 목젖까지 순해지고 나서야
침엽임을 들켜버렸습니다
긴 밤을 견딘 이슬의 언 손도
맞잡아 주겠습니다
◇임서윤= 경북 상주에서 출생, 계간 ‘문장’을 통해 등단 하였으며, 대구교육대학교대학원에서 교육학석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에서 문학석사를 받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형상시학회 회원. 시집 ‘사과의 온도’가 있음.
<해설> 요즘, 나이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시인은 문득 자신을 돌아보다가 이순에 이른 나이에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오후가 퍽퍽한 걸 느끼는 순간에 찾아온 것은 편백나무다. 꽃을 언제 피웠는지도 모르게 꽃핀 흔적으로 남은 초록별 닮은 열매들에게서 시인은 어떤 무거웠던 맹세도 가벼워지고, 복잡 미묘한 감정보다는 담백한 그대를 그리워하는 걸 보게 된다. 편백나무가 그러하듯 자기 자신의 모습처럼 서 있는 나무에게서 간밤의 찬 이슬도 손잡아 주어야겠다는 어떤 침엽의 반성을 여과 없이 받아 적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