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시인이 된 그녀의 낯선 얼굴
[결혼이야기]시인이 된 그녀의 낯선 얼굴
  • 승인 2023.05.1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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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리스토리 결혼 정보회사 대표·교육학 박사
미국의 심리학자 Joseph Luft와 Harry Ingham 고안한 대인관계 모형인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아의 모습을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즉, 열린 자아와 눈먼 자아, 감추어진 자아와 미지의 자아로 '나'의 모습을 구분하고 있다.
우선 열린 자아는 이름이나 얼굴, 키, 신체적 특징과 같은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는 '나'의 모습이다. 여기에 비해 눈먼 자아는 버릇이나 걸음걸이, 성격처럼 상대방은 잘 알지만 정작 자신만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의미한다.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나 열등의식 등과 같이 상대방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아 비밀로 하고 있는 감추어진 자아도 있다. 반면에 미지의 자아는 알 수 없는 나이다. 이러한 여러 자아들은 상대의 자아를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에 따라 대인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눈먼 자아나 감추어진 자아가 많아지면 대인관계는 원만하지 못하고 여러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조하리의 창을 떠올리게 된 것은 내가 아는 중년의 어느 시인 때문이다. 여류시인으로 어느 정도 성공해 이름을 얻은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아마도 초등학교 4~5학년 정도 여름방학이었다. 나는 시내에 살다가 아버지가 고향마을에 사과밭을 사게 되면서 시골로 이사를 갔다. 당시 아버지가 중학교 선생님이어서 농사도 짓지 않고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밤이면 호롱불로 별나라처럼 바뀌던 그때의 작은 시골 고향마을과 어린 시절의 추억은 수십 년째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서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때에 나는 시인이 된 그녀를 소꿉친구로 만났다. 3년 정도 방학이 되면 늘 만나곤 했지만 아버지가 도시로 전근을 가게 돼 이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대구에 살던 그녀는 방학만 되면 남동생 둘을 데리고 시골마을 작은 아버지 댁에 와서 한 달 정도 지내다 돌아갔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도 노모를 모시며 어렵게 사는 편이었지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지내는 어린 조카들을 위해 방학 때만이라도 시골로 불러 돌봐주곤 했다. 조용하고 작은 시골마을에 도시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왔으니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을 알아봤다.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자주 우리 집을 찾아와 함께 놀았다. 하얀 피부에 주근깨가 있고 앞니가 살짝 덧니가 난 그녀와 나는 친해졌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 집에 가서 작은 엄마 눈치를 보며 썩은 사과를 도려내고 함께 먹은 적도 있고, 우리 집 퇴청 마루에서 그녀와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었다. 감성이 풍부한 사춘기의 두 소녀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논하며 손 편지도 주고받았다. 가난한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을 나는 아직도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녀는 도시에서 눈깔사탕을 포장한 반짝이는 비닐 껍질이나 엽서 같은 것을 모아서 책갈피에 끼워두었다가 곱게 펴 내게 주기도 했다. 당시 내게도 낯설기만 했던 시골에서 그녀와 말동무 한 유년의 기억들은 흑백사진처럼 뇌리에 생생해 그녀는 어떻게 살까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향분을 만난 자리에서 시인이 된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나는 떨림과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순간에도 전화기 너머에서 금방 "야! 너였구나! 잘 있었어?"라는 반갑고 그리운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움으로 굳어져 버렸다.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이야기하고 지난 추억을 설명했는데도 차가운 돌처럼 무반응이었다.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저는 도시에서 오래 살아서 어린 시절 시골에 대한 기억 같은 건 없어요"라고 하면서 옛이야기나 추억 같은 것들은 듣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를 소개했지만 지나가는 사람 얘기를 듣는 것처럼 시큰둥이었다. 자신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도 않았다.

비참함과 참담함이 썰물처럼 몰려왔다. 상대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나는 나의 말과 감정들을 다시 주워 담느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횡설수설 겨우 마무리를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수십 년을 마음 한구석에 고이 간직해온 유년 시절의 아름답고 때묻지 않은 추억들이 쓸데없는 휴지 조각처럼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녀에게 유년은 어떤 것일까? 숨기고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은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추억을 부정하고 감정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녀의 시적 감성은 어디서 나오며 그녀가 토로하는 시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소중한 인간의 따스한 추억과 때 묻지 않은 감정들까지 부인하는 감추고 싶은 자아가 가련해 보인다.

결혼할 남녀가 가족사나 신체의 어떤 부분을 숨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요즘은 여성이나 남성들이 모두 상대의 외모 성격 등을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만큼 소중하게 생각한다. 맞선 때 키높이 구두와 숱이 적은 머리숱을 감추려고 가발을 쓰는 경우도 있다. 첫 만남까지는 예의상 애교로 받아줄 수도 있지만, 들통이 나기 전에 타이밍을 잘 택해서 소통해야 한다. 신혼여행 가서 첫날밤에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감추어진 자아로부터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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