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국과 핑크뮬리를 보며
금계국과 핑크뮬리를 보며
  • 여인호
  • 승인 2023.06.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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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산책하는데 후배가 강변에 흐드러지게 핀 저 꽃 이름이 뭐냐고 물어왔다.

“‘금계국’이라고 답했다. 정확히는 큰금계국이다.”

지난 연휴 금호강변에서도 많이 보았는데 꽃이름을 몰라 궁금했다고 후배가 말했다. 몇 년 사이 강변이나 도로변을 점령한 큰금계국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저 꽃이 이쁘기는 한데 너무 많아. 저 꽃이 우리 들판을 망칠 수도 있어.”

큰금계국은 미국에서 들어온 외래종이다. 환경부가 생태계 우려로 평가한 결과 2급 유해식물이다. 2급 유해 식물은 생태계 위해성이 높아질 가능성 있어 지속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는 생물을 말한다.

몇해 전 봄만 해도 내가 근무했던 안심습지 주변에는 갈퀴나물이 많았고 봄까치꽃, 봄맞이꽃, 꽃마리, 양지꽃, 토끼풀, 조개나물, 괭이밥, 메꽃, 붓꽃, 애기똥풀, 미나리아재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피었으나 지금은 큰금계국 세상이 되었다.

큰금계국처럼 최근 몇 년 사이 인스타 등 SNS에 많이 등장한 식물이 핑크뮬리 그라스이다. 흔히들 핑크뮬리라고 하는 것이다. 가을철 경관이 좋은 곳에서 볼 수 있고 카페 등 개인도 심고 있는 식물이다. 그간 봐왔던 토종 억새와 달리 분홍빛을 보이는 핑크뮬리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공터에 대규모로 심어둔 것을 두고 뭐라고 할 말은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토종 억새나 강아지풀, 수크령 등 잡초가 무성했을 공터에 핑크뮬리를 예쁘게 심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식물 자체의 문제보다는 유행을 찾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 수도 있다. 핑크뮬리 한 다발에 씨앗이 약 7만~8만개가 들어있다고 하니 엄청난 번식력을 갖고 있는 것을 간과한 채 예쁘다고 마구잡이로 심었기 때문이다. 2020년 공공기관에서 핑크뮬리를 심은 면적만 해도 11만1천988㎡로 축구장 16개 규모에 육박한다. 개인이 심은 것까지 합치면 그 면적은 더 넓다.

2020년 가을 억새가 아름다운 제주에서 핑크뮬리가 들불처럼 번지자 핑크뮬리를 심었던 행정기관이 다시 제거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적이서 핑크뮬리의 식재가 덜 한 것 같았는데 올가을에는 더 많은 핑크뮬리가 들판을 잠식하는게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카이로에 근무하던 가을, 핑크뮬리에 땅을 빼앗기게 된 토종 억새와의 추억이 있다. 영화 미나리의 순자(윤여정)가 물가를 찾듯 한국 생각이 나면 한번씩 나일강변을 찾았다. 그날은 시월이었다.

‘어, 억새가 벌써? 이곳에도 억새가 있구나.’ ‘아 한국은 가을이겠다. 곧 단풍도 시작되겠어.’

여전히 더운 북아프리카의 날씨로 인해 가을이 오는 것을 한국처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일강변의 억새가 가을을 일깨워줬다.

몸은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지만 억새로 인해 마음은 한국으로 향한다. 사계절이 있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집트인들에게 한국의 ‘가을’ 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단풍을 말한다. 단풍이 화려하여 외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나처럼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강변에 흔들리던 억새도 한국의 가을을 떠오르게 한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색색의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가로수 길을 걸어 학교에 가고 구절초, 쑥부쟁이 등 여러 들국과 산국이 춤을 추는 들판에서 박주가리 열매를 따 먹었던 추억도 갖고 있을 것이다.

화가들뿐만 아니라 문학가들도 들판에서 흔하게 보았던 식물을 글감으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대구지역 대표적인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그렇다.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라는 구절이 있다. 맨드라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맨드라미가 아니라 경상도 방언으로 민들레를 말하는 것이고 들마꽃은 제비꽃이라고 한다. 들마을의 경상도 방언인 들마와 꽃을 합쳐 들마을의 꽃, 마들꽃이라고도 하고 들에 피는 메꽃이라고 해석이 되다가 최근에는 ‘제비꽃’으로 확정되는 분위기다.

제비꽃이든 들메꽃이든 이 꽃들은 우리나라 들판에서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식물이다. 이상화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꽃피우는 한국 들판의 야생화를 바라보며 빼앗긴 국가의 독립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한겨울을 이겨낸 매화나 가을 서리에도 꼿꼿한 국화, 부귀의 상징 모란 등 식물이 상징하는 바가 한시에서부터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문학작품에 이어지고 있다.

금계국과 핑크뮬리를 보고 자란 아이가 봄의 대표 꽃을 금계국이라고 하고 가을에는 억새가 아니라 핑크뮬리를 떠올린다면 윗사람과 공감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긴다. 봄철 제비꽃, 들메꽃처럼 자생하던 꽃들이 사라진다면 식물의 다양성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식물에 대응되는 언어가 소멸된다. 언어의 소멸은 단순히 어휘 하나가 소멸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과 소통의 단절을 만든다.

현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이나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이라는 노래 한 소절을 가을에 같이 부를 수 있다면 한국인으로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올가을은 금계국에게 빼앗긴 봄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핑크뮬리를 빈 땅이라고 심을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곳에는 쑥부쟁이, 구절초가 필 수도 있고 억새가 흔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이 식물을 위한 것이자 사람을 위한 것이다.



손병철<대구교육청 장학관·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정책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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