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능소화 필 때
[달구벌아침] 능소화 필 때
  • 승인 2023.06.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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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좋은 영화는 다양한 각도의 즐거움을 준다. 보면서도 즐겁고 사람들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얘기하는 것도 재밌다. 그런데 간혹 예전 영화를 뒤늦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좀 외롭다는 생각이 여우비처럼 들이친다.
타이타닉을 이제야 보고 젊은 디카프리오에게 빠졌는데 그의 나이가 곧 오십이란다. 뒤늦게 도깨비를 보고 혼자 공유앓이를 하고 있는데 요즘은 다들 '글로리'라는 드라마 속 연진이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러면 정말 외로워진다.
좋은 건 언제 봐도 좋다. 하지만 지금 이때가 가장 좋은 것들도 있다. 능소화는 오늘의 능소화가 가장 예쁘고 노래도 요즘 노래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시간은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 여긴다. 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다. 갓 개봉한 영화와 화제가 되는 드라마도 챙겨보고 계절 따라 피는 꽃에도 한 번쯤 눈길을 내어주고 그즈음 뜨거운 이슈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지금, 오늘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놓친다면 후회가 일 것 같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
다시 유월이다. 온갖 봄꽃들이 다 지고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 갈 즈음 장마와 태풍을 견뎌낸 능소화가 핀다. 담장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어둠침침한 주택가 골목 안까지 환하게 불 밝혀 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무엇에라도 홀린 듯 나도 모르게 능소화 꽃그늘 아래서 발걸음을 멈춰 서곤 한다.
누구든 꽃처럼 만개하는 때가 있다면 툭툭 떨어지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지는 건, 지는 게 아니라'고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 내 지친 일상이 담장을 타고 내려와 가지 끝에 매달린 한 송이 꽃에 머문다. 붉은 신호등을 켠 듯 불을 켜고 나를 내려다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 그늘에 서 보니 그것만은 아닌 듯 허기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잠시 쉬어가라며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이라는 듯.
작가 중에는 책 한 권 쓰는 것보다 제목 한 줄 쓰는 게 훨씬 어렵다고들 한다. 어떤 제목을 붙여야 책의 내용을 대표할 수 있을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창 시절, 선생님은 일기를 쓸 때도 제목을 꼭 붙여보라고 하셨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한 게 아니라면서.
돌이켜보면 그것마저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날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멍때리는 날도 있었다. 매번 매 순간 모든 날에 제목을 붙이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냥저냥, 그저 그런 날도 있었다.
한 밤 중, 톡이 정적을 깬다. 유일하게 무음을 해 놓지 않은 단톡방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편집장의 느닷없는 질문이 던져진다.
"나의 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단어 하나만 선정해 주세요."
공지가 뜨기가 무섭게 동인들의 답이 줄줄이 이어졌다. '고립' '관계' '외로움' '인연' '슬픔' '안간힘' '이야기' '벽돌빼기' '혈관' 등등. 나는 '뭐라고 써야 하지'라는 고민에 빠져 밤새 잠들지 못한 채 실마리를 찾아 생각에 생각의 끈을 감았다 풀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우선 처음 떠오른 단어를 '인연'이라고 썼다. 하지만 내가 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이가 보는 내시는 어떨까 새삼 궁금해졌다. 주변의 몇몇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빠짐없이 물어보고 다녔다.
'큰언니 시는 청국장이지' 고개를 갸우뚱 한참 고심하던 막냇동생이 '청국장'이라고 대답했다.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또 다른 동생이 '웬 청국장'이냐고 되물었다. 막냇동생이 다시 능소화처럼 웃으며 '당연하지!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지' 한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단 한 사람의 칭찬이 백 사람의 칭찬보다 훨씬 더 마음에 깊이 와 닿을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가까운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는 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된장보다 청국장을 더 좋아하기에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나를 이해해 주는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다면 삶을 버텨내는 힘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은 용기를 얻었다.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해 냈으면, 다음을 위해 그 마무리도 잘해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나간 시절에도 제목을 붙여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제목을 붙여본다. 모호했던 것이 정리가 되고 애매했던 게 확실해지는 기분이 든다. 메일 보내는 하루에 제목을 붙여본다. '청국장 익어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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