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 젖는다는 것
[달구벌 아침] 젖는다는 것
  • 승인 2023.07.1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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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잠깐이면 되는 일이라고 문을 열어놓은 채 나갔다 돌아온 길이었다. 현관문을 여는데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봐도 안에서 잠겼는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중에 열쇠는 없고 눈앞은 캄캄했다. 해는 기울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며칠째, 집중호우 경계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휴대전화는 집 안에 있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인기척이라곤 없다. 어찌할 바를 몰라 현관 앞에 놓인 의자에 가만히 앉아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딸깍, 스위치가 켜지듯 문이 열린다. 흐뭇한 미소를 띠며 그가 집안에서 문을 열고 나온다.

심심해서 장난을 좀 쳐 봤다고 했다. 문이 잠겼을 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이 잠겼는데 어떻게 허둥대지 않고 미동도 없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지?"라고 묻는다. "고민하고 걱정만 한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님을 잘 알지. 그것보다는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담을 타고 뒷문으로 들어가 창문을 뜯어내든지 아니면…. 어떤 방법을 쓸지 모색하고 있었지"라며 대답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시인은 남다르네!"라며 손뼉을 치며 넘어갈 듯 웃는다.

얼마 전에 읽는 최백규 시인의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라는 시집의 '덫' 중 한 구절이 생각난다. "(…)/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않다/ (…)/ 덫처럼/ 아무리 끊으려 해도 질긴 게 있다 말하던 눈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바람의 위력이 대단한 하루였다. 초속 20미터 안팎의 바람을 큰바람이라 부르는데 이 큰바람은 작은 나뭇가지를 꺾고 5미터 이상의 파도를 일으키는 위력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바람에 속절없이 날아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정신없이 흔들려도 결국 제자리인 것이 있다. 큰 입간판은 날아가는데 비해 작은 민들레가 괜찮은 이유는 연약하지만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겠지.

큰바람이 지나갈 때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무게가 꽤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가볍고, 연약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심지가 깊이 박혀 있었구나 싶은 것들. 제자리를 지키며 산다는 건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흔들리고 매일 휘청대며 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자리만큼은 여전히 지키고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뿌리가 제법 자리를 잡았다는 뜻일 게다. 여기, 이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동안은 웬만한 비바람도 괜찮을 거라고 오늘도 나 자신을 믿으며 긴 장마에 젖은 마음을 툭툭 털어낸다.

비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정수리에 햇살이 박히듯 뜨거운 날도 있다. 양지가 있으면 응달 또한 공존한다. 젖어봐야 말릴 방법을 찾게 되고 찾다 보면 알게 된다. 산도 보고 물도 보아야 한다. 산은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물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길을 가야 하는지 일러주며 우리 옆을 감돌아 흘러간다.

장마철에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서면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 것만 같아 좋다. 자유롭고 시원하다. 피할 수 없는 것을 마냥 즐기는 일은 참 어렵지만 주저하지 않고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게 무엇이든.

비가 오는 날엔 아무리 큰 우산을 써도 신발이 젖는다. 양말까지 젖는다. 그러다 물웅덩이라도 잘못 밟으면 발목까지 흠뻑 젖기 십상이듯 내가 진심으로 마주할 때 오리려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젖지 않는 건 물 위를 유영하는 오리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들은 물이나 바람의 무게보다는 살아있는 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할 뿐이다. 어디에 속하는가를 확인하고 안심하게 된다면 내 삶이 불운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은 속단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도 나도 지금껏 이탈하지 않고 무탈하게 제 자리로 돌아온 이 순간이 참 고마운 저녁이다. 바람 불어 모여 앉기 좋은 밤, 폭우를 뚫고 무사히 날아가지 않고 집으로 잘 돌아온 그가 반갑다.

창고에 나방 한 마리가 갇혀 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벽에 착 달라붙어 있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줄행랑을 친다. 내 몸으로 옮겨와 다리 사이에 붙었다가 얼굴 주위를 맴돌 기도 하면서 어디로든 도망치기 위해 빈틈을 찾아 한참을 고심 중이다. 전 생을 다 해 몸부림치고 있는 듯 보였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죽을힘을 다해 애를 쓰고 있는 나방이 안쓰러워 문을 열어주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바깥을 향해 기력을 다해 날아오른다.
허공을 나는 새들과 바람은 비가와도 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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