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에 별똥별이 떨어져 바위가 돼…‘삿갓 쓴 노인’ 닮아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에 별똥별이 떨어져 바위가 돼…‘삿갓 쓴 노인’ 닮아
  • 김종현
  • 승인 2023.07.1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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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별에서 온 그대, 삿갓바위
최치원, 달성을 ‘태극의 중심’
“말하자면 이곳이 바로 성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두사충
국운을 내다보고 조선에 귀화
신천의 물길 ‘태극 모양’ 직감
음의 중심 해당 하는 곳에 터전
금호강어부
삿갓바위 아래 금호강 어부. 그림 이대영

◇두사충의 명당 찾기

서기 909년 최치원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서 달성(達城土城)을 ‘태극의 중심(天元)’으로 보고 “말하자면 이곳이 바로 성지다(曰是處是聖地也).”라는 은유적 표현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의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진린(陳璘, 1543~1607)의 처남이며, 오늘날 측지장교에 해당하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 장령(將領) 두사충은 망해가는 명나라의 국운을 내다보고 조선에 귀화했다. 귀화 후 경상도 도병마사 진영에서 거처하면서 신천의 물길이 태극모양을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S자모양의 태극음양구획선을 기준으로 음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明堂)에다가 터전(陽宅)을 잡았다.

이와 같은 천기를 “하루에 천 냥의 부가 쏟아지는 길지(日益千富之處).”라고 아들(杜山)에게 귀띔했다. 그곳에다가 선화당을 짓고 거처하다가 1601년에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이주해 들어서자 그 명당을 관아로 선뜻 내주었다. 그가 그곳을 명당으로 본 사연은 그곳을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현빈(玄牝, 오늘날 black hole)으로 봤기 때문이다. 고천문학(古天文學)에서 말하는 북두성에 사는 천계(天鷄)의 계후(鷄後, 알을 낳는 똥구멍)로 봤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장악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했다. 패주하는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승리를 서두르다가 벽제관(碧蹄館, 오늘날 경기도 일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여송은 말에서 떨어져 많이 다쳤다. 그 화풀이로 두사충에게 ‘군진을 잘못 선택한 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형 군령이 떨어졌다. 당시 우의정이며 명군 접반사였던 약포 정탁이 “죽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내게 넘겨주겠나?”라고 이여송을 설득해 구명되었다.

이때를 생각해서 나중에 두사충은 보은차원에서 “제가 정해드린 양택(連珠佩玉穴, 오늘날 聞慶市 加恩邑)에 사시면 대감 같은 정승이 세 분이 나올 것입니다. 돌아가신 후에 유택이 될 곳도 잡아놓았습니다.”라고 ‘감여요람(堪輿要覽)’이란 비기를 첩책에 적어 드렸다.

그러나 결국 그 명당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가)들이 그 명당을 찾고자 모여들고 있다. 오늘날까지 감여가들이 필독서로 읽고 있는 게 바로 ‘모명선생유결(慕明先生遺訣)’이란 책이다. 그 책에선 “지사(地士, 風水家)가 욕심이 없어야 눈이 열리고(地士無慾開眼), 눈이 열려야 산천의 정기를 볼 수 있다(開看山川精.) 그래서 옛 신선들은 욕심 없는 지사가 풍수에도 신선이라고 했다(無慾地仙).”라고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사실, 두사충이 점지해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이라는 양택명당(陽宅明堂, 집터)도 음택명당(陰宅明堂, 묘터)도 정탁(혹은 후손들)은 찾지 못했다. ‘연주패옥(連珠佩玉, 3대정승)’ 예언을 확인하고자 상신(相臣) 정탁(鄭琢)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했다. 정탁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선 총 466회(국역본 232회, 한문본 234회)나 실록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최초기록은 1566(명종21)년 10월 4일자에 ‘정탁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다”로 돼있다.

마지막은 1772(영조48)년 1월 17일자다. ‘고(故) 상신 정탁은 몇백 년 후에 그 자손들이 등과하여 하대부(下大夫, 당하관)가 되었으니, 기이한 일이라. 고 승지 정옥의 아들을 해당 부서에다가 이름을 물러서 현주녹용(懸註錄用)하게 하라... 손자를 물어보고 일체로 조용(調用)하게 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삼대상신(三代相臣)’은 아니더라도 ‘삼대대부(三代大夫)’가 되었다. 이런 현상을 당시 국왕 영조까지도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했다.

두사충 선생이 골라준 명당에 집도 무덤도 쓰지 못했으나 삼대대부 집안이 되었다. 명당에 조상을 모시거나 집을 지어도 ‘삼대적선적덕(三代積善積德)’ 혹은 ‘발복칠덕(發福七德)’을 쌓아야 비로소 받는다는 게 ‘명당발복(明堂發福)’이다. 하지만 정탁 선생의 후손들처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마음보만 잘 써도 받는다는 ‘명심발복(明心發福)’이 합리적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급하게도 로또복권 1등 당첨, 집권여당 무투표당선 혹은 비트코인 투기 등으로 금(즉)시발복(今時發福)을 가장 선호한다.

◇삿갓바위(笠巖)

2013년 SBS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별에서 온 그대(You Who Came From the Stars)’ 드라마로 한류의 추진력을 과시했던 적이 있다. 지구촌에 인류가 생겨나고 모두가 ‘하늘의 자손’임을 자랑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인정받는 증표를 갖기를 원했다. 작은 나라의 국왕은 물론 제국의 천자들은 하나같이 하늘의 인정표시인 ‘운석검(隕石劍, meteorite sword)’을 갖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래서 대구에서도 신천에 별똥별이 떨어져 바위가 되었는데 그 모양이 ‘도롱이 입고 삿갓을 쓴 노인’ 같다고 삿갓바위(笠巖)라고 했다. 삿갓바위는 바다 혹은 강섶에 있는 바위(切巖)나 단애(斷崖)를 갉아먹는 모양이 버섯, 삿갓(umbrella) 혹은 남근과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신비스러운 연유를 가진 삿갓 바위에 대해 서거정은 ‘입암에서 고기 낚시(笠巖釣魚)’라는 시를 통해 “연기처럼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을 늪 섶에서, 혼자 자리를 잡고 낚싯줄 드리우니 별놈의 생각이 다 든다네. 물비늘(윤슬)인지 물고기비늘인지 반짝이지만 미끼(줄)로 잔챙이고 준치를 모르겠는가. 황금 자라는 잡지 못하겠지만 낚싯줄 드리움은 멈추지 못하겠네”라고 묘사했다. 낚시꾼도 없는 밤하늘 별을 보고 신천의 물고기들은 쏟아지는 별들을 먹이로 생각하고 물 위를 날아서 ‘별 따먹기’ 놀이를 했다.

삿갓 바위를 고서지(古書誌)를 통해 살펴보면, 1757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엔 “삿갓바위는 신천 물가에 있는데, 그 모양이 사립옹(笠翁)과 같았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져 삿갓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조족산(法伊山, 수성못 옆 법이산)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1767년 및 1908년 ‘대구읍지’와 1895년 ‘영남읍지’에서도 같은 내용을 게재했다. 이와는 달리 “신천 가운데 있으며(新川中), 모양이 사립옹을 닮았다(在川中形如笠).”라는 1861년 ‘대동지지(大東地誌)’의 기록도 있다. 여기서 ‘새 발 모양의 산(鳥足山)’은 강수 혹은 해수의 침식작용으로 단애들이 ‘새 발(鳥足)’ 혹은 ‘코끼리’ 모양으로 깎인 산들을 말했다.

1831년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서 “운석이 삿갓바위가 되었다는 세간의 전설이 있으나, 조족산에서 왔다(世傳星隕爲石自鳥足山來).”고 기록하고 동시에 “조족산은 도호부 동쪽으로 이십리에 있으며, 일명 법이산(法伊山)이라고 한다. 이곳에 봉수대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고, 산맥은 팔조령(八助嶺)에서 내려 왔다”고 했다.
 

 
글 =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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