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코드만 뽑으면
[달구벌아침] 코드만 뽑으면
  • 승인 2023.07.30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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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휴대전화나 컴퓨터 화면이 멈추거나 먹통일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땐 버튼을 눌러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켬으로써 강제로 재부팅을 해야 한다.
'부팅'이라 말하면 장화가 떠오른다. 서부 영화 등에서 카우보이들이 말을 탈 때 신는 가죽 장화를 보면 뒤꿈치 부분에 금속 조각이 붙어있다. 이것은 말을 탄 채 총을 쏠 경우 채찍질 대신 발로 차서 말을 빨리 달리게 하는 것에 비유해 붙여진 설이라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살아가는 일도 생각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온종일 골방에 놓인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수행하듯 글과 책, 그리고 시간과 씨름하기 일쑤다. 폭등한 전기세가 신경 쓰여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곤 하는 날이 잦다. 오후 늦게 퇴근한 그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자연 바람이라도 쐬며 잠시 걷자는 것이다. 이보다 더 설레고 부담 없는 데이트 신청이 있을까 싶은데, 글 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지키는 일이 더 소중한 일이란다.

반강제이긴 하지만 하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데로 앉아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향을 틀어보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뜻하지 않게 새로운 풍경을 만나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 뜨거운 안부를 주고받을 때도 있다.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기억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잊고 있던 어떤 마음이 되살아 나 글감이 되기도 한다.

문득 언젠가 읽었던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 중 '중요하다, 소중하다'에 관한 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이 세상의 일들은 서로에게 소중하지만 아직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함이 사라지고 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 세상 부부들은 서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미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디론가 숨어들고 있다.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중요한 것이 소중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진 않지만, 글을 읽고 나니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이 가진 미묘하고도 분명한 차이를 알 것만 같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고 배워가는 중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안전할 수 없다는 땅도 머금을 수 있는 수분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보다 위험할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체험한 지도 채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선다는 게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 것인 줄 깨닫게 되는 요즘, 마음의 한계도 한 번쯤 돌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방심하고 무너져 내리기전에 잘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자주자주 잘 살피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마로 인한 피해와 산사태가 채 복구되기도 전, 폭염경보가 발효되고 전북 장수군 북쪽서 규모 3.5 지진이 발생했다는 긴급재난문자가 기상청으로부터 발송된다. 올해 한반도 지진 가운데 규모 3위에 이른다고 한다. 해가 져도 열대야는 식을 줄 모르고 여전히 무더위의 기세는 꺾일 기미조차 없어 보이는 칠월의 마지막 휴일이다.

얼마 전, 보일러가 고장이 났던 적 있었다. 한겨울에 고장이 난 것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을 듯싶지만,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고역이었다. 전국 대부분 지역의 장마에 이어 폭염경보가 내려진 마당에 방바닥까지 뜨거우니 숨쉬기조차 힘에 부쳤다. 몇 시간 후 A/S 기사가 와서 보일러를 살피더니 "그냥 코드만 뽑았다가 다시 꼽으면 되는데요."라고 했다.

코드만 뺐다가 꽂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온종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던 나를 돌아보니 어찌나 민망하고 미안하고 허무하든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서두를수록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쓰지 못한다는 속담이 완행열차의 기적소리처럼 내 머리를 꿰뚫고 천천히 스쳐지나간다. 해법이 떠오르지 않을 땐 두뇌를 콘센트라 생각하고 잠시 코드를 빼보는 것은 어떨까. 쉽게 생각하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달라질 수 있지만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소중한 존재와 소중한 가치 곁에서 편안한 저녁을 누렸으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오래오래 걷고 또 걸을 수 있기를 꿈꾸어 보는 아무튼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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