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 오징어, 문어 같은 두족류가
명예척추동물이 되었다지
지구의 중심까지, 그 반대편까지 긴 통로를 내고
중력의 방향으로, 반대편에서 다시 중심으로
나는 세상 속에 완벽하게 숨어든다
두족류는 대합조개, 굴 따위와 달리
정교한 신경계를 갖기 때문이라는데
명예교수, 명예시민은 언감생심
명예인간이나 꿈꾸어보는
노루 한 마리 길동무할까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가 필요 없겠지
깊고 어두운 통로
암실에서 뜬 눈을 다시 감았다 떠 보듯
◇김령= 2014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 대상 시 부문 당선. 2017년 ‘시와 경계’ 신인상 당선. 2019년 ‘어떤 돌은 밤에 웃는다’ 시집 발간.
<해설> 명예라는 말을 직함 앞에 달기 위해서는 얼마나 명예로운 행적이 있어야 하는가? 명예퇴직한 나, 이지만 명예의 본색이 가끔 의심스럽다. 시인도 명예교수, 명예시민을 언감생심이라 생각한다. 명예척추동물이 되었다는 문어 낙지 오징어는 그럼 패러디인가? 사실인가? 알 수 없지만, 그냥 자신을 명예인간으로 꿈꾸어보는 저 소박함에는 일종의 울컥한 감정이 스며 있다. 명예인간을 꿈꾸는 것은, 노루의 수준이면 적당하다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는 필요 없겠다고 정교한 신경계를 갖지 못한 자신을 자학하듯 나무라고, 통로를 찾지 못해서 눈만 감았다 떴다 하며. 슬프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슬플 일 없는 현실 앞에서 남들이 갖지 못한 정신의 통로를 우주 밖으로 개척하는 시인의 명예로운 운명을 되새겨보게 하는 시.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