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선을 넘어
[달구벌아침] 선을 넘어
  • 승인 2023.08.1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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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무차별하게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밤, 야간 빗길 운전이 위험한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 차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빗물에 반사된 선이 모두 지워진 것만 같다. 제 아무리 베테랑 운전자라 하더라도 야간에 빗길을 달린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가깝고도 멀리 있는 일이 되기 십상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 가느다란 선 하나가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선을 지키고 선 안에 머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약속인가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밤엔 속도를 지키고 앞차를 잘 따라가며 길 위의 모든 운전자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순간 모든 운전자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난다고 했던가. 선생님의 뒤를 따라 한 손을 높이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는 유치원 꼬마들처럼 앞차가 켜 든 붉은 비상등만 잘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마와 태풍 ‘카눈’이 지나간 후, 다시 폭염 속이다. 주택가, 대문 밖 쓰레기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내어놓을 수 있는 요일도 시간도 어긴 체. 적정선을 넘어 미어터질 기세다. 골목 끝, 전봇대에 지친 듯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안에 담긴 쓰레기 위로 용량을 초과한 쓰레기가 무허가 건물처럼 더 덧대어져 있다.

행여 누구라도, 아니면 골목을 오가는 고양이들의 발길질에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속의 것들이 울컥울컥, 불어난 홍수처럼 범람할 것만 같아 위태로운 생각이 들던 바로 그때였다.

백 리터나 되는 쓰레기봉투는 급하게 뛰어나가던 나의 헛발질에 튕겨 나간다. 퍽! 하고 쓰러지고 만다. 때마침 청소차가 쓰레기를 수거하던 중이었다.

발에 걸려 넘어진 쓰레기는 앞집 욕쟁이 여자가 내놓은 것이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묶이지 못하고 삐져나온 나머지 쓰레기들은 유리테이프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된 듯 묶여있다.

그녀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쓰레기를 남의 집 앞, 전봇대에 당연한 듯 버리기 일쑤였다. 시간도 요일도 무시한 채 아무 때, 아무렇게나. 대책 없이. 바닥난 양심과 함께.

장정의 미화원 둘이 쓰러져 나뒹구는 쓰레기봉투를 일으켜 세운다. 마주한 네 손의 힘을 모아 겨우 차 위로 들어 올린다. 미화원의 어깨 위로 쓰레기봉투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범벅이 된다.

잠시 기우뚱하던 차에 비닐이 찢어진다. 철사나 구겨진 캔, 깨진 유리 조각이며 구멍을 뚫지 않은 일회용 가스용기와 담배꽁초 등 사방이 온통 한데 섞인 쓰레기로 난장이다.

‘만이불일(滿而不溢)’이란 말이 있다. 과욕에 의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무엇이든 충분하게 채우되, 넘치지는 않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홍수에 물이 넘쳐 둑이 무너지고 길이 사라지고 터전이 폭삭 주저앉아 사람들이 죽어 나가듯, 주변의 물건들이 모두 젖어 못 쓰게 되는 것처럼 쓰레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높아지고,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은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자주 위태롭게 넘쳐흘러 제풀에 무너지고 만다면 슬픈 일이 아닐까.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에나 ‘적정선’이 있듯, 취할 것과 버릴 것들에도 경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르는 선에 맞게 절제하고 삼가며 유익하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철철 넘치게 한다거나 남용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도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누워 못다 핀 꿈을 다시 꿰매어 본다. 내 맘의 쓰레기를 타인의 맘 안에 함부로 무단투기하지는 않았는지. 제 앞가림은 내가 하고, 살아야 하듯 내 집 앞, 내 맘은 내가 쓸고 닦을 수 있기를. 그런 깨끗한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어 나아가 세상이 좀 더 맑고 고요하기를.

아침이 오고 있다. 하늘이 열린다. 때맞춰 부려놓은 가을이 푸르고 해맑다.

때 이른 귀뚜라미 한 마리가 선을 넘어 화장실에 들었다. 길을 잃었는지 헤매고 있다. 화장지를 풀어 손에든 채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야 죽을 자릴 잘못 찾아온 것임을 깨달았는지 더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사방을 날뛴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내 손에 잡히고 만 그를 문밖 화단으로 살려 보내 주었다. 곧 다가올 가을을 맘껏, 제대로 누려보길 바라는 맘속 짧은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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