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가지지 않고 대자연 껴안아 만끽하며 행복 얻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가지지 않고 대자연 껴안아 만끽하며 행복 얻어”
  • 김종현
  • 승인 2023.08.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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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금호 음풍농월에 세상 먼지가 날아가
금호강 ‘琴’자를 따 금호정 세워
정자 난간에 눌암 이기수의 詩
세상만사 유유히 흘러감 알겠네
선비들 청빈소요 철학으로 삼아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베개…
의롭지 못한 부유 뜬구름과 같아
금호강금호정
금호강 금호정. 그림 이대영

◇금호 바람결에 금호정(琴湖亭) 탄금성이 가세했다지?

금호강변 정자로는 1425(세종7)년 대구지군사(大丘知郡事) 금유가 건립한 금학루를 신호탄으로 요산요수풍류(樂山樂水風流) 속에서 학문에 온 힘을 쏟던 영남유림들에게 새로운 강안문학(江岸文學) 혹은 와유문화(臥遊文化)를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부읍지 등에서 기록된 누정(樓亭)이 많으나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금호강 섶의 정자로는 전응창(全應昌, 1529~1586)의 세심정(洗心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의 소유정(小有亭)과 압로정(狎鷺亭), 박충후(朴忠後, 1552~1611)의 태고정(太古亭), 윤대승(尹大承, 1553~몰년미상)의 부강정(浮江亭), 정광천(鄭光天, 1553~1594)의 아금정(牙琴亭), 이주(1556~1604)의 환성정(喚星亭), 이종문(李宗文, 1566~1638)의 하목당(霞鶩堂), 최동집(1586~1664)의 농연정(聾淵亭) 및 서유민(徐有敏, 1795~졸년미상)의 가학정(稼學亭)이 있다.

1864(甲子)년 금호강 동 섶에 권성윤((權聖允, 1835~1921)이 금호정(琴湖亭)을 세웠다. 금호정기(琴湖亭記)엔 갑자년(甲子年) 단양일(端陽日, 음력 5월5일 端午日)에 지었다는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6)에 관한 글이 있다. 그곳에 나오는 ‘지우학(志于學)’ 단 3자의 글자에서도 파리장서(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생의 기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금호강의 이름이 금학루에 기원을 두고 있었듯이, 금호강의 금(琴)자를 따서 금호정(琴湖亭)을 세웠다. 정자 난간에 걸려 있었던 눌암(訥巖) 이기수(李冀洙, 1855~1931)의 시(詩)는, “세상 만사가 유유히 흘러감을 알겠다네. 금호강 물 위에다가 정자를 세웠다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젊어서 배울 기회를 놓치고 보면 많은 여한이 돌아오는 법이지. 흰 머리카락이 날리고부터 삶을 계획하겠다니 어찌 그리 많은 세월인가? 외로운 돛단배 순풍에 맡겼더니 달과 함께 찾아드니, 멋진 친구야 술잔이나 같이 나눠가면서 시나 한수지어볼까(孤舟風與月相招, 好友酒兼詩試看). 유교 경전에 남아있는 글자가 몇이나 될까? 어린아이들 그때가 가히 다시 돌아나 오겠는가?” 이어서 “금호정 위로 바람이 불어오니 나 혼자만이 알겠는데. 세상 삼라만상이 또다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물고기가 듣고 새들이 몹시 졸고 있는 낮이라. 술잔 주고받으면서 거문고 노랫가락을 즐겨야 할 이때라지.”라고 읊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금호정(琴湖亭, 1864 갑자년)이 세워지기 이전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이 은거했던 아금암(牙琴巖)이 있었다. 아들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1553~1594)이 다사 죽곡 아금암(牙琴巖)에 1586(선조19)년 ‘아금정(牙琴亭)’을 세웠다. 임하(林下) 선생은 이곳을 후학양성을 위한 강학당으로 썼다. 아금암(牙琴巖) 혹은 아금정(牙琴亭)이라는 이름은 ‘백아의 거문고(伯牙之琴)’를 줄인 말로 ‘백아(伯牙, BC 387~BC 299)가 거문고를 뜯고 그의 풍류우(風流友) 종자기(鍾子期)가 감상하던 바위’가 바로 아금암(牙琴巖)이었다. 그러나 ‘아금정(牙琴亭)’은 “백아는 풍류우 종자기가 별세하자 탄금을 중단했다(伯牙絶絃).”는 각오처럼 임하 선생은 후생가외의 강학을 하겠다는 결의를 담았다. 그러나 부자지간에도 생각 차이는 이렇게 달랐다. 낙애 선생이 아금정에서 ‘푸른 솔(靑松)’이라는 시제(詩題)를 낸 것 만으로도 그의 심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아금 바위 위에 혼자서 누웠으니, 멀고 먼 어릴 때 생각이 나는데. 솔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낮 졸음까지도 달아나버렸네. 이런 게 바로 백아의 거문고 소리가 아닌가?”라고.

또한 임하(林下) 선생이 아금정에서 쓴 ‘금암초당에서 즉흥시(琴巖卽事)’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옮기면 “송단(松壇)에 소객(詩人墨客)들이 돌아가고 해는 장차 기울어지는데. 갈대띠 집에서 홀로 등잔불 켜놓자 밤은 깊어만 가는데. 조용히 서책을 대하니 인적은 끊어지고 적적하기까지 하다네. 달빛 비치는 강물의 차가운 기운에 놀란 기러기들이 소리를 지르네.” 이를 받아서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 아금정(牙琴亭)을 방문하고 남긴 시 “덕망이 크다 보니 높은 풍모가 부자(父子) 같구먼. 난새(봉황)가 머물고, 고니가 머물던 언덕이라 맑은 강물까지 비치네. 스승님(杖履)으로 받들며 같이 몇 번이고 감사하였던가? 오늘 나 홀로 읊으니 이 늙은이 목까지도 다 메이네.”

△풍류는 소유(所有)가 아닌 소요(逍遙)로

‘소유(所有, belonging, wealth)’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걸 가짐(가짐)이고, 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所有權)와 이를 마련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생활(生活)이다. 물론 성경(聖經, 시편37:16)에서는 “악인의 풍부한 소유를 부러워하지 말라. 차라리 선인의 적은 소유가 더 귀하다.”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서도 “세상 모든 물건에 각기 임자가 있는 법이니 내 것이 아니면 비록 털끝만큼이라도 취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고전에서 ‘소유(所有)’라는 글로는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제국부(帝國賦)에서 “(일본) 나라의 도읍에서부터 동북쪽으로 후지에다(駿河州)까지 천릿길인데 (모두 개인소유인 가운데) 중간에 산이 있는바 후지산이라고 한다”는 개인소유의 엄청남을 경탄하는 기록이 있다. 2010년 ‘무소유(無所有)’의 저자 ‘법정(法頂)’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책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무소유’를 권장했던 사례로는 1939년 조선총독부 출판 ‘수신서(修身書)’에서 “건강한 사람이 가장 많은 이득을 얻고,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큰 부자가 된다. 믿고 의지할 친구가 있다는 게 최고의 행복이고, 진흙탕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게 가장 즐거움이 아니겠는가(無病最利, 知足最富. 厚爲最友, 泥洹最樂)?”라는 불경구절을 인용하여 황국신민의 도리로 “건강이 가장 귀중하고, 만족함이 가장 부자(無病最貴 知足最富)”를 강요했다.

안빈낙도(安貧樂道) 혹은 청빈소요(淸貧逍遙)를 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의 선비들은 “가지지 않고도 대자연을 껴안아서 만끽함으로써 최대의 행복을 얻음(無所有得逍遙遊)”를 추구했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베개를 베고 잔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즐거움이야 그 가운데 있도다. 의롭지 못하게 부유하고 고관대작을 한들 뜬구름과 같도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는 청빈한 삶을 추구했다. 이때 금호강 섶에서 ‘청빈소요유(淸貧逍遙遊)’를 즐겼던 누각으로는 1561(명종16)년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이 검단동 왕옥산(王玉山) 구릉지에 만든 압로정(狎鷺亭)과 남쪽의 ‘소유정(小有亭)’이 대표적이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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