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사랑의 속도
[달구벌아침] 사랑의 속도
  • 승인 2023.08.2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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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화단에 뿌리를 둔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오른다. 한 발 두 발 대수롭지 않게 아주 서서히 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안방 창문을 온통 뒤덮었다. 여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창을 열면, 창 뒤에 덧대진 방충망, 그 좁은 틈 사이사이로 여린 발목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움켜쥔 발바닥이 모여 초록 담쟁이 커튼을 치고 있다. 햇살이 들어올 수 없도록 촘촘하게 스크럼을 짠 채 막아서고 있다. 저리도 죽을힘을 다해 올라서봤자 곧 여름은 지나갈 것이며 다시, 바닥이란 걸 안다.
그녀는 자식들 출가시키고 이제 둘만 남아 제대도 한 번 재미나게 살아보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와 달리 자꾸만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그의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녀가 생각난다.
마음고생이 많았던 그녀는 몸도 마음도 몹시 지친 상태였다. 뭘 하고 싶은 마음도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며 그저 쉬어지는 숨만 쉴 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군다나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다며 내뱉는 말투가 잘 벼린 칼날 같았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전까지는 그녀를 향해 거침없이 마음을 쏟았던 그였다고 했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그가 요즘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며 울먹인다.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듣고만 있다가 그녀의 조바심을 알고 있다는 듯 내가 말을 꺼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정체 구간을 만날 때가 있지. 빨리 내달리고 싶은 마음에 과속하다 보면 너무 뜨거워 우린 모두 다 타 죽고 말걸."
농담처럼 툭 던진 내 말속에서 진심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을 슬쩍 신문지속 전단지처럼 끼워 넣었다. 그런 내 말이 변명처럼 들렸는지 아니면 말장난처럼 들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사랑이 기울어 갈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사랑이 뜨거울 수도 있고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아.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안정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어 난"
예전 네루다가 등장하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찾아서 본 기억이 난다. 네루다가 한 말 중에 '모든 꽃을 꺾을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라는 말이 뇌리에 박혀있다.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 혹은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신비로운 연대감은 바로 '타인의 상처라는 거울에 비친 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아픔에서 비롯된다는 글을 본 적 있다. 그녀의 상처라는 거울에 비친 내 상처의 투명한 민낯을 바라본다. 나와 닮은 상처를 지닌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파블로 네루다에게 편지를 가져다주는 집배원 마리오가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면서 가슴앓이하는 부분에서 마음이 딱 멈춰버렸던 기억이 울컥, 목울대를 타고 넘어온다.
마리오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파블로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빨리 나아야 할 텐데…."라고 말했을 때 뜻밖에도 마리오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에요. 절대로 낫고 싶지 않아요. 오래 앓을 거예요." 라고 대답하던 그의 목소리만이 여름의 끝자락, 도시의 소음보다 더 크게 울어 재끼던 매미들의 울음소리처럼 맴돈다.
몸이 마음을 품지 못하고 마음이 몸을 받아내지 못해 악순환만 계속된다며 그녀는 요즘 상담 받으러 다닌다고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가 힘들었다.'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문가를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사랑이 힘든 것은 서로의 속도가 자주 어긋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날, 상담 받고 돌아오는 길이라며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그녀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쳐흐른다.
"그래 그거였어. 어릴 적 받은 상처로 인해 내가 분리불안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 어쩌면 사랑하느라 힘든 게 아니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진짜 사랑은 아직 시작도 못 한 건지도 몰라. 누구도 가두지 않았던 조바심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들어가 버린 자신을 꺼낼 수 있는 한 줌 빛이 보이는 것 같아."
그녀의 상기된 목소리가 파도처럼 마음에 자꾸 부딪힌다. 창을 가두고 있던 담쟁이넝쿨을 낫으로 죄다 끌어내리는 소리 바깥에서 들려온다. 한차례의 가을바람이 벽을 타고 들어와 방안을 맴돌다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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