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투명한 꽃
[좋은 시를 찾아서] 투명한 꽃
  • 승인 2023.09.0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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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귀자 시인

잡으려던 유리그릇을

물 묻은 손이 밀쳐내고 말았다

결빙구간에서 미끄러지던 얼음 알처럼

쨍그랑 산산조각이 났다

영롱한 크리스털 파편

천 마리 학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엉뚱한 카타르시스가 깨금발로 솟구친다

범람하는 샹들리에 불빛으로

발바닥을 파고든 슬픈 유리 조각은

뜨겁도록 사랑했다는 고백

부딪히면 깨어진다는, 누군가 사랑을 두고 한 말

멀찌감치 두고 보라는 뜻이었구나

흘러내리는 벽시계가 힐끗

외출에서 늦어진 살바도르 달리 씨

흰 수염을 꽁꽁 얼리고 있다

◇피귀자= 2003 ‘수필과비평’ 수필, 2014 ‘창작에세이’평론, 2018 ‘인간과문학’공모 시 당선.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수필과 지성’ 창작아카데미 원장 등 역임.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시), ‘수필과 비평’문학상,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 등 수상. 형상시학회 회원. 수필집: ‘종이날개’,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음.

<해설> 지극함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장자의 한 구절이 첫 연의 서두를 연다. 유리가 얼음 알이 되고 얼음 알이 깨금발이 되고, 깨금발이 슬픈 사랑의 고백이 되고, 그런 사랑은 멀리 두고 보라는 어떤 사랑의 이치가 느껴지는 시다. 살바도르 달리 씨와 시인의 관계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가 누구이든, 세기의 화가이든, 남편이든, 연인이든 문제는 그는 외출에서 늦어져 있고 벽시계는 흘러내리고 있다는 그것이 바로 시인의 의식일 것이고, 벽시계는 또한 그의 수염을 하얗게 얼리고 있다는 것. 여기서 흰 수염은 선반쯤에서 손을 이탈한 유리그릇과도 묘한 어떤 연관성을 갖는다. 한 사람이 늙음에서 오는 덧없음 혹은 허무의 상징일 수도 있겠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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