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를 보면 당신을 떠올리겠습니다
능소화를 보면 당신을 떠올리겠습니다
  • 여인호
  • 승인 2023.09.1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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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히는 한여름 동안 돌담 위에서 꽃을 피우던 능소화가 힘을 잃고 있습니다.

담벼락 밑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던 꽃도 비에 씻겨 소멸하고 있습니다. 떠나보내야 할 때이지만 몹시 안쓰럽습니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다’고 한 조지훈 시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벚꽃처럼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잎이 지는 꽃이 있는 반면, 능소화처럼 송이째 떨어지는 꽃도 있습니다. 송이째 떨어지는 꽃은 고운 생을 단번에 마감하는 것 같아 한 잎 한 잎지는 꽃보다 더 슬픔을 줍니다.

능소화처럼 송이째 떨어지는 꽃잎으로는 동백꽃이 유명합니다. 동백꽃의 낙화를 두고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다‘고 문정희 시인은 말했습니다. 동백꽃의 가장 눈부신 순간은 언제일까요? 만개한 꽃이기보다는 한창 꽃이 피어나 통으로 모여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낙화하는 동백꽃 모습을 ’전존재로 내지르는 피 묻은 외마디‘라고 시인은 표현했습니다. 활짝피지도 못한 채 갑자기 뚝뚝 눈물처럼 떨어지는 꽃 모양입니다.

낙화한 동백꽃은 시들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누워있어 땅에서 한 번 더 피어납니다. 그 모습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모습 같아서인지 예기치 않는 나쁜 일을 두고 춘사(椿事)라고 합니다. 동백을 말하는 춘(椿) 자를 사용합니다. 춘(椿)자는 봄 춘자와 나무 목자가 결합한 것으로 소설 ‘춘희(椿姬)‘의 한자가 춘(椿)자입니다. 이 소설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로 원래 제목은 ‘동백꽃을 들고 있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번역을 거치면서 한자로 ‘춘희’가 된 것입니다. ‘춘희’는 남녀 주인공의 애달픈 이루지못한 사랑이 주요 내용입니다.

서양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춘희라면 한국에는 <능소화 하늘 꽃>이라는 오페라가 있습니다. 이 오페라의 이야기는 안동지역 택지개발 구역에 있었던 이응태라는 분의 무덤에서 발견된 4백여 년 전의 한글 편지에서 시작됩니다. 원이 아버지께라는 편지글에서 “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능소화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라고 원이 엄마는 말합니다. 피붙이를 두고 사별한 남편을 죽어서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유난히 무더웠고 폭우가 많았던 2023년 7월 18일 우리에게 춘사가 있었습니다. 능소화가 하늘을 향할 때 박 선생님은 가장 눈부신 청춘을 바쳤습니다. 꽃이 지는 것은 꽃에게도 참 아픈 거라고 했는데 당신의 아픔이 얼마였을까 생각조차 힘듭니다. 아픔을 이겨내며 희망을 노래하려 했던 당신은 이글거리는 태양에 맞선 능소화였습니다. 비록 박 선생님은 이 세상에 없지만 선후배, 동료의 마음속에 능소화로 피었습니다. 능소화 한 송이가 떨어질 때마다 그들은 기와색 아스팔트 위로 모여 거리를 물들였습니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지만 돌담에 기대어 피는 능소화처럼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7주째 거리에 모였습니다. 삼만이 오만이 되고 십만이 삼십만이 되어 박 선생님이 꿈꿨던 교실을 만들어 달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능가하는 슬픔입니다.

9월 4일은 49재, 박 선생님이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비는 천도의 날입니다.

박 선생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엄마의 동창이지만 매주 당신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엄마의 슬픔을 직접 닦아줄 수는 없지만 울면서 비통함을 이겨내기를 기도합니다. 전국의 선생님들이 당신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함께 울고 있습니다.

박 선생님,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교실 한 켠의 선생님이 만드셨던 마음해결소에 이생의 힘들었던 마음은 내려놓으시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빕니다. 해마다 여름이 찾아와 붉은 능소화가 피면 당신을 떠올리겠습니다.



손병철<대구교육청 장학관·전국시도교육감협회회 정책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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