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역사적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수요칼럼] 역사적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 승인 2023.09.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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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경제학 박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군 및 광복군 영웅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 계획에 이어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공동 청사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념적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시절 카자흐스탄에 특별기를 보내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당혹스럽다. 이러한 논쟁은 건국 과정에서 벌어졌던 좌우 대립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다.

우파는 봉오동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영웅인 것은 맞지만, 공산당에 가입하고 러시아 자유시 참변에 관여한 전력을 들어 육군사관학교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반면 좌파는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이 일제 괴뢰 정부인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초급장교로 근무한 이력을 들어 친일파로 소환했다. 이에 우파는 식민지 청년인 20대의 초급장교를 친일파로 매도한다면 1920년생인 문재인 전대통령의 부친 문용형 씨가 일제 시대에 흥남읍사무소 농업계장으로 근무한 전력을 들어 친일파라고 반격하는 등 전입가경이다.

1948년 반민족행위자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친일파를 청산하려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로 청산하지 못했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에 항복하고 세운 프랑스 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단죄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단죄를 주장했다. 일제 시대 친일파 인사와 독일에 부역한 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단죄론을 비교해 보면 공통점은 단죄에도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 계열 및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민족주의자들의 의견이 대립한다. 차이점은 일제 식민지 조선의 조건과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조건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프랑스 젊은 청년들이 사회적 사다리를 타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군인이 되거나 신부의 길로 가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은 1830년에 왕정복고기의 이야기이며, 계급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시대상 속에서 평민인 주인공의 벼락 출세부터 파멸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프랑스 비시정부를 이끈 필리프 페탱과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프랑스를 이끈 샤를 드골은 나폴레옹이 세운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다.

일제 시대 조선 청년들은 사농공상에 의해 공무원이 되거나 월급을 많이 주는 큰 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희망했다. 반면 가난한 수재들이 입학할 수 있었던 곳은 사범학교나 만주국 군관학교였다. 건국 과정에서 좌우 대립,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해 많은 지식인들이 납북된 후 4.19와 5.16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이끈 주도세력의 공통점이 사범학교나 육사(만주와 일본, 한국), 그리고 일본 유학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프랑스와 대한제국이 처한 조건은 다르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제2차세계대전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하자 당시 84세의 노장 페탱 장군을 소환했다. 페탱은 프랑스 영토의 삼분의 일인 남프랑스의 자치권을 얻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반면 드골은 영국에 망명하여 자유프랑스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까지만 해도 페탱의 인기는 굳건했으며, 두 사람이 합작하여 프랑스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공산당, 사회당계 레지스탕스와 드골이 힘을 합치면서 드골은 친페탱 세력과 확실히 선을 긋고, 자신과 페탱이 합작한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페탱 처벌 여론에 불을 지폈다.

반면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병합당할 때 인구가 2천만명이었다. 시몬 쿠즈네츠는 인구 2천만명을 가진 국가를 대국으로 간주했다. 우파 논객인 김용삼 기자에 따르면 "한국병합은 군인 한명 움직이지 않고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냈다"고 자화자찬한 당시 통감부 외사국장을 지낸 고마쓰 미도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무능한 왕을 비판했다.

단죄 대상에도 차이가 있다. 샤를 드골은 언론인에게 면죄부를 주면 곡필을 휘둘러 국가의 도덕성과 윤리를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언론인들을 가혹하게 단죄했다. 해방 후 한국은 최남선, 이광수 등을 친일파로 매도했지만, 언제부터 좌파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혹은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초급장교를 모두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일본이었으며. 일본인 교사 밑에서 일본어로 공부했던 식민지 조선과 독일과 치룬 전쟁에서 패배한 후 안위를 위해 독일에 부역한 프랑스 인사를 동일선상에서 비판하는 것은 논리비약이다. 그렇다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무능한 대한제국의 왕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자칫 일제의 식민지를 합리화 시켜 주는 모순이 생길 수 있다. 역사적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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