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복기의 시간
[달구벌아침] 복기의 시간
  • 승인 2023.10.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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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그늘진 곳만 찾아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찬바람이 불어와 살 속과 뼈 마디마디 깊이 파고들어 와 온몸을 움츠려들게 한다. 파랗던 잎새는 어느 순간 가랑잎이 되어 흩날린다.
얼마 전부터 목이 아프다. 노래를 부르거나 말할 때 쓰는 목이 아니라 머리와 몸을 잇는 목이 아팠다.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잠자리에 들면 가장 곤혹스러웠다. 천장을 보며 똑바로 눕거나 비스듬히 모로 누운 채 어떤 자세를 취하더라도 편하지 않다. 전기뱀장어처럼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저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잦다.
누군가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인사는 하는데 고개가 잘 숙여지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은 일상이 하나둘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남은 생 앞에 두 손 두 발 모두 다 내려놓을 것만 같은 불안이 드리운다. 마냥 청춘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몸이 마음을 따라잡기에 버거운 시절에 이르렀구나 싶다. 평소 같아선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을 잘 찾지 않는 편인데 막다른 골목에 선 것처럼 더는 참을 수도 숨을 곳도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목 디스크입니다."
"치료를 얼마간 해야 나을까요?"
내가 다시 물었다.
"완치는 어려워요. 죽는 날까지 다만 버텨내야죠."
고개를 푹 숙인 채 책이나 스마트폰을 오래 들여다보거나 컴퓨터 사용 시 화면을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것 등 구부정한 잘못된 자세와 생활 습관이 만들어 낸 일이라 한다.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엄포를 놓았다.
생각해보니 목이라는 말은 하나같이 중요한 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신체 부위는 물론 곡식의 이삭이 달린 부분도 목이라 하고 유일한 통로가 되는 중요한 길도 우린 목이라 부른다. 새로운 하루와 계절, 그리고 새달로 넘어가는 시월의 길목에서 서성인다.
가을은 다음 해의 농사에 대비하여 논밭을 미리 갈아 두는 '가을갈이'와 수확하는 '가실'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가을이라는 말의 어원이 '깃다', '기울다'라는 말에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달도 차면 기울고 가을들녘의 벼 이삭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며칠 전, 다녀온 순천만습지의 갈대들도 모두 다 바람 부는 쪽을 향해 기댄 채 기울기를 반복한다. 꺾이지 않고 다만 흔들렸다. 무념무상 바람이 일러주는 데로만 다니는 듯 보인다. 논과 밭, 길목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서 있던 해바라기 역시 품었던 씨앗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씨앗 가득 넉넉한 햇살과 꿈을 머금은 채.
지금 나의 태도와 자세 또한 방향이 내일의 나를 결정한다는 것, 어쩌면 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복기(復碁)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다시 처음부터 놓았던 그 순서대로 놓아 보는 일이다. 이즈음 우리에게도 바둑의 고수처럼 걸어온 시간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복기의 시간'이 필요할 성싶다.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다 보면 정말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습관과 일들을 지금이라도 알아낸다면 그래서 다시는 같은 실수나 후회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청춘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작아지고, 뒤처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오래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때가 많다. 경험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귀중한 나만의 자산이 되어 적립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지곤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왔나 되돌아보면 오늘보단 내일이 더욱더 나을 거라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릴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좀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던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그 희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은 하루, 그 수많은 날의 하루하루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조금 더 뒤에 굉장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다독이며 시월, 지금까지 우릴 붙잡고 온 희망에 기대 새날을 향해서 성큼 발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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