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리더십의 원천은 비전과 희생이다
[수요칼럼] 리더십의 원천은 비전과 희생이다
  • 승인 2023.10.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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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벌써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도 안가에서 고향 후배인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 씨는 "각하 괜찮으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각하께서는 "난 괜찮다"고 하면서 체념한 듯 해탈한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5,000년 가난을 해결하기 위에 5.16혁명을 일으켰다는 박 대통령은 혁명 공약에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혈관 역할을 하는 고속도로 건설과 산업에서 쌀인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철산업의 경우 일본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얻어야 가능하다고 인식한 박 대통령은 가네야마 마사히데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기술협력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가네야마 대사는 친서를 주는 박 대통령의 눈빛에서 조국 근대화를 위한 지도자의 애절한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도와 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해방 이후 신생 독립 국가인 한국은 미국의 원조 없이는 지탱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으나,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9년에는 한국은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되면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의회 수석경제분석가인 브라이언 웨스버리는 한국이 세계 경제에 가져다 줄 밝은 미래를 가진 나라라는 의미로 '미스터 선샤인'으로 불렀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삶에서 어떤 부분들이 국가의 틀을 바꾼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먼저, 엘리트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인맥이다. 박 대통령은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수재들이 갈 수 있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의무 복무를 마친 후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광복 후에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형성된 군 인맥으로부터 인품과 능력을 검증받은 박 대통령은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만주와 일본 육사 인맥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5.16 때는 육사 5기와 8기 출신이 큰 힘이 되었다.

둘째, 출신 성분이 가난한 소작인의 자식이다. 선친은 영남 일대의 대지주인 장택상 집안의 논을 소작하면서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였다.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았지만,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장기간 결석한 예도 있었다. 장택상은 소작농 아들인 박정희 대통령을 박정희 씨, 박정희 군으로 낮춰 불렀지만, 말년에는 무릎을 꿇었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낀 박 대통령은 어떻게 보면 밥이 곧 정치요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셋째, 사농공상에서 탈피한 과학입국이다.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중국의 린이푸 교수는 근대 이전 중국이 서양보다 경제, 과학, 기술 측면에서 더 발달했고 했다. 그 이후 서양에 뒤처지게 된 원인은 기술혁신이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형태에서 과학과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형태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하고, 공과대학과 특성화 고등학교 육성을 통해 배출한 과학 인재와 기능 인력은 산업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넷째, 기존의 틀에 구속받지 않고 최고의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하였다.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은 그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에서 박 대통령은 "우수한 인재를 신중히 발탁한 후, 신임하고 일을 맡기면 장기 복무시키며, 책임을 완수한 인사는 승진시켜 계속 활용한다"고 했다. 이 시대에는 테크노크라트의 활동 무대였다.

오늘날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사농공상의 부활로 인재의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사회적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민들은 특권 없는 사회를 원했지만 시나브로 특권 카르텔이 고개를 내밀고, 몽유병 환자처럼 민생으로부터 유체 이탈한 정치는 선거 때만 되면 민생을 찾는다. 민심을 잃은 정치권은 팬덤에 의존하거나 외부에서 혁신위원장 영입이 총선 승리를 위한 방정식으로 고착화됐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인요한 연세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박 대통령은 시대의 모순과 역사적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에 민족 중흥에 올인하였다. 냉전 시대에는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부국강병과 진보적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통치 방법으로 인해 친일·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국민들과 함께 피와 땀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박 대통령의 비전과 희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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