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가을 별책부록
[달구벌아침] 가을 별책부록
  • 승인 2023.11.0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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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한걸음에 계단을 내려선다. 우체통 앞에 멈춘다. 통 안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누가 보낸 어떤 소식일까 궁금해 가슴이 설렌다. 한 뭉치의 우편물이 손에 잡힌다. 한꺼번에 꺼내어 내 것이 있나 이름을 살핀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머리끝까지 불길이 치솟는다. 머릿속이 갈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하얗게 센다. 대체 뭐가 그리 바빴던 탓일까. 학교 앞, 어린이 보호 구역 내에서 속도위반했다는 이유로 날아온 과태료 통지서다. 벌점 15점과 함께. 이미 지나간 일이라 되돌아볼 틈도 가치도 없다 여겼다. 곧장 기억에서 삭제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인 양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사전 납부를 한 후 통지서를 찢어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 버렸다. 나쁜 기억이라든가 불필요한 감정은 얼마든지 지워도 괜찮다 여기며 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계절이 우리 곁을 건너가고 있는 길목에 서 있다. 흐르듯 건너가는 게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꾸만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 세상을 버린 어머니를 그리며 무섬을 찾던 날이 떠오른다. 외나무다리 위에 넋 놓고 앉아 물살보다 더 천천히 흘러가는 모래알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눈 앞으로 흘러와 등 뒤로 떠내려가는 물살과 흘러온 적 없는 듯 무심히 흘러가기만 하는 물살이 버린 애인처럼 다시 만난 연인처럼 동행한다는 걸.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고 흘러오며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이란 그림자와도 같다. 털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 질기고 애틋하게 달라붙고 마는 도깨비풀 같은 것이다. 생의 가을에 서고 보니 시선이 머무는 각도가 조금씩 달라져 있다는 걸 느낀다. 좋든 싫든 생각나면 나는 대로 잊히면 또 그대로 잊는 데로 기억을 굳이 애써 지우려 들지 않는다. 그토록 잊고 싶었던 일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픔을 딛고 일어선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훈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언젠가 한 도서관에서 그해에 출판한 책 제목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들을 집계한 일이 있었다. 일위는 사랑이 차지했다. 다음으로 우리, 세상, 행복이 뒤를 이었다. 도서관에서는 이 단어들을 이어 붙여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 세상 행복하게'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사랑이 우리를 키우고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가 세상을 이루며 사랑 많은 세상 속에서 행복이 피어나는 그런 따뜻한 세상을 누구나 꿈꾸고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단어들을 한 자 한 자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왠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따로 서 있는 겨울나무보다는 오종종히 무리 지어 핀 봄꽃 같은 느낌이랄까. 책 제목에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단어라는 의미가 되리라. 너나 나나 우리는 모두 사는 내내 보편적으로나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단 하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세상 행복하게 사는 일인 듯하다. 좋은 것들끼리 다정하게 연결되어 더 좋은 날들을 위해 한발 한발 천천히 나아가는 일상이길 바라본다.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이 계절이 한 권의 잘 만들어진 별책부록처럼 재미있게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꿈을 다시금 꿔본다.
조금 더 나누어야 할 계절을 우리는 겨울이라 부른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남편의 스마트폰에서 지난 주말여행 사진을 찾아보다가 놀랐다. 우리가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게 맞나 싶게 나와는 다른 사진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단풍나무를 찍고 있을 때 그는 하늘을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찍고 있었다. 내가 우리 앞에 차려진 음식에 감탄하며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때 그는 식탁 의자의 문양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자꾸만 나를 앞질러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다 대고 같이 좀 가자며 서운함을 토로했는데 그게 걸어오는 나를 찍어 주기 위한 것이란 걸 사진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화장대 앞에 앉은 나를 등 뒤에서 바라보며 내 눈가에 잔주름이 보기 좋다고 한 것이 날 놀리기 위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웃고 있는 얼굴을 크게 찍은 걸 보니 그게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사진첩 속,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내가 몰랐던 그를 많이 알게 되었다. 아마 그도 나처럼 내 앨범을 보면서 내심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렇게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면 같은 상황에서도 의견이 달랐던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는 일이 가끔은 '외롭다' 느낄 때가 있지만 그래도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우린 그저 다르다는 걸 인정하며 사는 날까지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가끔은 이렇게 앨범을 나눠보면서 조금씩 알아 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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