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고려가 후삼국 통일하자 중국식 성씨제도 전국에 반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고려가 후삼국 통일하자 중국식 성씨제도 전국에 반포
  • 김종현
  • 승인 2023.11.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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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고려 이후 갖게 된 우리나라의 성씨
1055년까지 귀족층도 성씨 없어
中 인물 차용해 시조로 족보 제작
조선초기 양반 군역면제 수단
왕건, 개국관료들에 사성 실시
증보문헌비고에 성씨 총 496개
2015년 조사 때 5천582개 나와
상위 10개 성씨 국민 64% 사용
족보
조선초기 시작된 족보 위조.

◇유교 신분제(桎梏)의 탈피수단인 위보(僞譜)

고려 태조는 사성제(賜姓制)와 본관단성제(本貫單姓制)까지 했으며, 고려사 기록에 보면 1055(문종9)년까지 귀족층에서도 대부분 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과거에서 성씨 없이는 합격시키지 않는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 Sealed Envelop System)는 고려사(高麗史)에 의거하면, 1011(현종2)년부터 시행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식 단성과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대주의에 입각한 중국 인물을 차용해 시조(始祖)로 족보를 만들었다. 사실 대부분은 중국기록과 무관했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공격이 심각해지자 봉미제도에서 거란족과 여진족의 차별을 두게 되고 족보상에서도 선계(先系)가 변천했다. 고려 고종 때는 복성 제갈(諸葛)씨가 제(諸)씨와 갈(葛)씨로 나눠지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족보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이고, 중국은 한나라,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라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 족보는 1562년 문화류씨 가정보라고 했으나, 최근엔 1476년 안동권씨세보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런 족보가 조선시대 들어와 사대주의를 넘어 아예 모화사상으로 굳어져 아무런 인연도 없는 중국성씨를 조상으로 삼아 봉제사하게 되었다. 예의동방지국의 조선유교국가에서 족보를 간행하는 이유론: I) 동성불혼과 계급내혼제의 강화, ii)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iii) 적서의 구분, iv) 친소의 구분, v) 당파별의 명확화를 도모했다.

조선초기에 유교신분에 따른 i) 양반에게 조세와 군역면제, ii) 상천신분(常賤身分)에서 면천수단(免賤手段)으로 족보위조가 필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정적 보완수단으로 사용한 공명첩(空名帖)이 벼슬자리를 매관매직하는 바람에 신분세탁을 국가(조정)가 아예 대놓고 백성들에게 부추겼다. 양반들은 이에 호응하여 자신의 양반족보에 속칭 투탁(投託, 민간에서 두탁이라고 했음)하는 거간꾼까지 생겨났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건국 초기부터 족보문제가 기록된 사항이 140건이나 발생했다. 그 가운데 특히 투탁문제가 국가조정에 논급되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례는 9건이나 되었다.

실제로 영조실록(1764.10.19.)에서는 “역관 김경희라는 자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사람들의 보첩(族譜)을 많이 모아 놓고 시골에서 군역을 면하려는 무리를 유인하여 그들의 이름을 보첩에 기록하고 책장을 바꿔 주는 것으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엄중히 조사해 중히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사헌부에서 영조에게 보고했다. 당시 양반만이 아니라, 관원, 성균관, 향교, 서원 등의 유생들에게 군역면제가 있었기에 신본증명서(身本證明書)로 족보가 이용되었다. 김경희 사건 발생 23년 뒤 1787년 4월 27일자 정조실록에서도 “요즈음 간사한 백성들이 유명한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의 면제를 도모하는 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를 엄하게 금지(禁止)시켜 주십시오”라고 했고 1791년 1월 22일자 박필관이라는 백성이 신문고에 올렸던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등 단속요구가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

◇최초 성씨집계문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한반도의 성씨정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한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보급과정을 i) 고려 초 사성(賜姓)이전 성씨(삼국 및 가야 왕실), ii) 중국에서 동래한 성씨(自中國東來姓), iii) 고려초 사성(麗初賜姓)으로 크게 분류하고 있다. 940(태조23)년 전후로 성씨분정(姓氏分定)으로 전국 군현제(全國郡縣制)를 실시했다. 왕건은 즉위 이후 개국관료, 개국공신 및 귀순호족(歸順豪族)들에게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 신라왕가 3성씨(朴, 昔, 金)와 6부성씨(李, 崔, 鄭, 孫, 裵, 薛)를 내렸다. 한(韓), 마(馬), 전(全)씨 등의 유래 성씨는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되었다.

중국 당나라 때 9세기 혹은 10세기 군별성씨서지(郡別氏族書誌)로 둔황석굴에서 발견된 ‘군망표(郡望表)’와 남송(南宋)의 정초가 저술한 ‘통지략(通志略)’혹은 ‘씨족략(氏族略)’이라는 씨족지와 1454년 265개 성씨를 조사했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대조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i)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했으며, ii) 중국에 없는 한국고유의 성씨는 16개 성씨로 박(朴), 심(沈), 하(河), 옥(玉), 명(明), 준(俊), 석(石), 제(諸), 익(益), 삼(森), 방(邦), 방(芳), 가(價), 승(勝) 및 승(承)에 지나지 않았다. iii) 당나라 ‘군망표’에 없는 박씨를 제외하면, 11세기 남송 ‘통지략’에 나오고 있다. 성씨취득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 국(國), 읍(邑), 향(鄕) 등의 지명을 성자(姓字)로 사용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유명한 사람의 이름자에서 연유한 것이 다음으로 많았다. 박·석·김(朴昔金)과 같은 신라의 종성(宗姓)은 신라출자(新羅出字)이며, 후삼국시대이래는 호족들의 한자성씨화로 우연히 중국성자와 같아지는 사례가 많았다.

서지적(書誌的) 기록을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265여개 성씨, ‘동국여지승람(1486년)’에는 277개 성씨, 영조 때 ‘도곡총설(1766년)’에는 298개 성씨, 고종 때 ‘증보문헌비고(1903년)’ 496개 성씨가 망라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는 창씨개명으로 줄었다가 2003년에 귀화인을 제외한 한국성씨는 286개였으나,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5천582개 성씨가 나왔으며, 한자가 없는 성씨가 4천075 개까지 되었다. 한자성씨 1천507개에 비해 증가했으며, 관향으로는 3만6천744개로 최다 관향은 김해김씨가 전인구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상위 10개 성씨에 전체 국민의 63.9%나 집중된 특이성을 갖고 있다.

지역(貫鄕)별로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어 i) 북한지역으로 차(車)씨, 강(康)씨는 대부분 황해도 지방, 계(桂)씨, 선우(鮮于)씨는 대부분 평안도 지방이다. 동(董)씨는 대부분 함경도 지방에 많다. ii) 남한지역으로 권(權)씨, 박(朴)씨는 경상북도, 곽(郭)씨, 하(河)씨는 경상남도다. 신(辛)씨, 함(咸)씨는 강원도다. 가(賈)씨, 임(任)씨, 그리고 맹(孟)씨는 충청남도, 변(卞)씨, 어(魚)씨는 충청북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소(蘇)씨, 온(溫)씨는 전라북도, 나(羅)씨, 국(鞠)씨는 전라남도에 집중되었다. 고(高)씨, 양(梁)씨는 제주도에 많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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