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아버지의 웃음 2
[달구벌아침] 아버지의 웃음 2
  • 승인 2023.11.1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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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아버지는 비안장날, 도리원장날, 안계장날이 되면 집에 오는 시간이 늦었다. 그 날은 비안장날이었으니. 비안 술 집 어딘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였다. 돌아오고 싶은 시간이 되면 오겠지 홍희는 생각했지만 엄마는 어린 아이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한 것처럼 아버지를 걱정했다. 아버지가 사고라도 날까봐 걱정하는 것인지,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질까봐 걱정하는 것인지, 술취한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엄마를 힘들게 할까봐 걱정하는 것인지, 술을 마시며 돈을 쓰는 것이 아깝고 속상해서 걱정하는 것인지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없고, 엄마는 스스로 말을 해 준적이 없다.

홍희는 어두운 밤에 빈집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다. 밥도 먹지 못해 허기가 져서 공복감과 공포감이 섞여서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우선 배를 채우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누런 철제 밥상이 빨간 보자기로 덮여 있었다. 오늘은 맛있는 반찬이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간장종지와 김치, 된장찌개였다.

엄마는 왜 홍희에게 밥을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고 가버린 걸까. 아버지가 와서 먼저 먹은 것을 알면 노하기라도 할까봐 그랬나. 나중에 같이 먹으려면 조금만 먹어야 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밥 반 그릇에 된장국을 말아 먹었다. 짭쪼롬한 된장찌개가 맛있었다. 된장에 파, 고추만 들어갔다. 두부도 귀했다. 그 때는 감자농사를 짓지 않았는지 감자도 없었다. 그래도 맛있었고 지금도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된장찌개가 엄마와 같이 떠오른다.

밤이면 적막한 마을이, 빈 집에 혼자 있으니 더욱 적막했다. 적막한 어둠속에 홀로 빈집에 있으면 왠지 슬픈 감정이 생겼다. 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하지 않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계셨고, 작은오빠도 같이 살았다. 아버지, 엄마가 없어도 혼자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 엄마가 없으니 혼자다.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쓸쓸한 마음이 생겼다. 그 느낌을 잊고자 아랫방에서 TV를 보기 시작했다. TV속 세상은 홍희네 집과 달리 밝고 유쾌했다. 밤 7시를 지나 8시가 가까워지자 밖에서 사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후딱 TV를 끄고 방문을 열고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나갈 때와 들어올 때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싫어하고, 인사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도 늘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들에 일하러 나갈 때도, 장에 갈 때도, 마실을 갈 때도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했고, 집에 들어서면 잘 갔다왔다고 인사를 했다.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높아졌다. 얼른 인사를 하고 할머니 등뒤에 숨었었다. 술 취한 아버지는 평사이 모습이 아니었고 화난사람 같았다. TV속에서는 아버지가 술 취해 들어올 때는 맛있는 과자를 사오거나 아이들 용돈을 주기도 했지만 현실 아버지는 무서웠다.

지금은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숨을 등이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 뒤를 죄지은 사람마냥 쭈그리고 따라왔다. 엄마 등 뒤로 숨을 수가 없다. 엄마도 사냥꾼에게 잡힌 위태로운 짐승같았다. 아버지는 인사를 하는 홍희를 흘끗 쳐다보고 매서운 눈빛을 지었다. 마치 때리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홍희는 잘 못한 것이 없다. 학교가서 공부를 했고, 아이들과 잘 놀았고, 집에서는 얌전히 있었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서 밥상을 꺼내왔다.

동그란 철제밥상에 세 사람이 앉았다. 술을 먹으면서 밥을 먹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아버지를 찾아다니느라 저녁을 먹지 못한 엄마, 기다리면서 조금만 밥을 먹은 홍희. 반찬을 별로 없어도 배고픔이 시장이라고 맛잇게 밥을 먹으려는 찰나.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밥상 모서리를 두들겼다. 노래부를 때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는 것보다는 훨씬 큰 소리가 났다. 홍희는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 엄마는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웃음이 많은 아버지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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