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윤 개인전 갤러리 코파
정희윤 개인전 갤러리 코파
  • 황인옥
  • 승인 2023.11.2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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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 아닌 작가의 예술세계 추구
작품 20점에 10여년 작업 확인
새로움 찾아 회화 아닌 판화 매진
만족할 크로키 위해 30여년 작업
두려웠지만 연습으로 대안 찾아
매너리즘 우려 다시 회화도 병행
작가 필요 덕목은 몰입·자기확신
정희윤작가개인전
정희윤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코파 전시장 전경.

150호 규모의 대형 판넬에 성인 남자가 웅크리고 있다. 어머니의 자궁 속 아이 같은 모습이다. 손과 발, 그리고 얼굴에서 감정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회화 작품도 눈길을 끈다. 얼굴을 주제로 한 정희윤 작가의 신작들이자 회화로의 회귀를 본격화한 작품이다. 갤러리 코파 정희윤 개인전에 신작인 회화를 비롯해 지난 10여년 간 지속한 동판화 등 그의 작업 전반을 확인하는 작품 2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동판화였다. 주부와 작가를 병행하던 시절, 작업에 대한 두려움에 갈등하던 시기에 동판화를 만났다. 당시 그는 고뇌하던 40대의 자신의 초상화를 동판화로 구현했다. “판화를 만나면서 희미하던 길이 밝아졌어요. 동판화가 저 만의 작업세계를 만들어가는 핵심 매체로 다가왔죠.”

새로운 매체인 동판화를 처음 작업할 때만 해도 동판화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물성과 작업 방식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 의식 전반을 지배했다. 그는 오직 집중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극복해갔다. 한 곳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하는 덕목으로 인식했다. 동판화에 10여년을 매진하자 두려움은 성취감으로 변해갔다.

동판화의 근간은 인체드로잉이다. 인체 드로잉은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매료된 실린 에곤 쉴레의 작품에서 영감은 받아 진행됐다. 작가로 본격화하던 시기, 독특한 미감과 감동을 전하는 에곤 쉴레 특유의 선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됐던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체 드로잉을 시작했다. “선 중에서도 인체가 주는 선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선이라는 생각에 인체에 천착했어요.”

예술성 높은 인체 드로잉을 얻기 위해 그는 인체누드크로키에 30여년을 꾸준하게 임했다. 크로키가 드로잉의 출발로 삼은 것. 이에 따라 일주일에 하루를 오직 누드크로키에 할애하며 자신만의 선을 구축해왔다. 단 2분 30초 만에 모델의 동작을 빠르게 잡아내는 작업 특성 상, 크로키는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으로 기능했다. 비록 1년에 수 천장을 그려도 만족할 만한 크로키는 단 20여점에 불과하지만, 그는 크로키를 통해 명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동판화나 회화의 경우 물성이나 화면 구성에서 내적인 갈들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누드 크로키는 찰나의 작업인지라 무아지경에서 작업을 하게 됩니다. 명상이나 다름없었고, 힐링이었죠.”

5년 전부터 회화도 병행하고 있다. 모티브는 의외로 전통 민화였다. 평소 전통미술 정도로만 여겼던 민화에 대한 인식이 어느 순간 새로움의 단초로 다가오면서 민화를 작업의 또 하나의 모티브로 삼았다. 그는 해체하거나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단순화해 재구성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민화를 현대미술의 범주로 격상시킨다. 특히 8 대 2의 비율로 오브제와 물감이 혼용하며 전통 민화를 재해석한다. 오방색의 비단 천을 중심 오브제로 하고, 20%만 물감을 칠하며 자신만의 민화를 구축한다. 분채를 사용하는 것도 동양적인 색을 얻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가 “동양적인 선과 동양적인 색채에 나의 감수성을 더해져 정희윤만의 작품세계를 형성한다”고 했다.

“판화는 작업 과정이 경직될 수밖에 없지만 회화는 보다 자유로울 수 있어요. 판화에서 경직성을 즐기고, 회화에서 주체성을 즐기며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판화와 회화를 병행하는 즐거움인 것 같아요.”

이번 전시에서 회화의 확장이 두드러진다. 얼굴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 3점이 대표적이다. 향후 얼굴 작업들만으로 전시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민화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소품 위주였다면, 얼굴 작업은 대형으로 규모를 키웠다. 여기에는 회화가 주는 보다 큰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있다.

회화에선 아크릴 물감과 먹을 혼용하며 예술세계를 확장을 감행한다. 먹은 동양성과 깊이감 확보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유난히 컸던 그의 작가정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새로움을 갈구하는 그의 성향은 미술대학 재학시절부터 발현됐다. 고정관념의 타파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에게 새로움은 핵심 대안으로 다가왔고, 30여년 작업 여정의 탐구 대상이 됐다. 판화보다 회화를 높게 인식하는 국내 미술계 분위기가 없지 않음에도 판화에 매진한 배경에도 새로움에 대한 특유의 갈증이 자리했다. 다시 회화로의 회귀도 판화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통해 고정관념을 타파하려 했어요. 그래야 저만의 작업 세계가 열린다고 믿었죠. 하지만 기존의 물성이나 매체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고, 저는 그런 대상들에서 새로움의 단초를 저만의 해석으로 확보하려 했어요.”

낯섦을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치환하는 것은 오직 단련뿐이다. 작가 역시 그런 믿음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연습은 결국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실패마저도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실패할 당시의 괴로움을 이겨 나갔다. “괴로움조차도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선택한 것이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었으니까 행복할 수밖에요.”

에곤 쉴레처럼 좋은 선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고난 천재성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는 아니라”며 “연습”을 대안으로 찾았다. 지난 30여 년간 누드 크로키를 하며 독자적인 선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연습의 결과였다. 판화에서 회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붓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는데, 이 역시 부단한 연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기술이나 물성 극복을 위한 것이라면 언제든 전문가를 찾아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저 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는데, 연습만이 목표에 한 발 다가서는 길이라고 믿었어요.”

작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몰입과 자기 확신이다. 시류에 휩쓸리면 독자적인 예술세계는 요원해진다. 그는 다행히 은둔자에 가까운 성향의 소유자였다. 그가 자신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누가 뭐래도 제가 만족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했고, 그것은 집중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외부에서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외골수로 한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 자신만의 선 예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고정관념을 따라가기보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찾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삼아가고 있는 정희윤의 개인전은 3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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