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틈을 메우는 사람들
[문화칼럼] 틈을 메우는 사람들
  • 승인 2023.12.0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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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칼럼니스트,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일전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지라 노래봉사를 했다. 십여 년 전 그때까지 한창 무대에서 노래를 하다 어느 날 정말 뜻하지 않게 공연장 관장이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접었던 노래다. 당시 대내외적으로 약속하길 관장이라는 예술경영의 세계로 접어든 이상 앞으로 노래는 하지 않겠다. 필드는 필드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관장일도하고 무대에서 노래까지 한다면 세상에 염치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끔씩 진정한 봉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야 감사히 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이 약속을 지켜왔다. 어쩌다 연습이야 하기는 했지만 몰두하지 않으면 감각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매우 부담스러운 마음을 안고 찾아간 현장은 병원이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화상전문병원인데 매주 일요일마다 환자들을 모신 작은 음악회를 몇 년 째 하고 있었다.

나는 군대생활 때 화상환자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일이 있었다. 훈련 중 입은 부상으로 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화상환자들과 같은 병실을 쓰게 됐다. 왜냐하면 당시 심한 화상환자들은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 씩 화상 부위의 드레싱을 새로 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에 괴로워하는 동료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의료기술이 많이 발전했으니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지만 아직도 화상치료과정은 참 힘들 것이다. 그래서 따뜻한 분위기의 작은 음악회를 통해서 환자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의도 정도로 이해했다.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는 병원장이었다. 낮에는 환자의 환부를 어루만지며 치료하는 그는 일요일 저녁에는 트럼펫 연주자로 변신한다. 연주 솜씨도 훌륭하지만 병원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의사 선생님의 변신 그 자체가 환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리라 생각 들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날 공연을 마치고 관계자들과 가진 늦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함께 연주 한 금관오중주 팀이 병원 직원이라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뒤늦게 음악을 배워 연주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전도유망한 전공자 다섯 명을 직원으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체의 업무 부담 없이 오직 연습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공을 했으나 대학 졸업 후 또는 해외 유학을 마쳤지만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운 음악인의 미래를 위하여 정규 직원으로 영입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암담하다고 해야 할 만큼 어려운 현실에 직면했을 수도 있는 젊은 연주자들이 매월 고정적 급여를 보장 받으며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지금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 든다. 트럼펫을 연주하는 원장선생님과 함께 인생의 가장 멋진 시간을 만들어가는 그들의 행복한 에너지는 환자들에게도 가감 없이 잘 전달되는 선순환구조가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매월 다가오는 지출에 대한 부담과 신분보장에 따르는 책임감 때문에 꼭 있어야 할 예술단체가 엉거주춤하게 자리매김해 있는 사례들이 있다. 그래서 구·미 극장의 사례를 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단체부터 정상화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러나 예술단체의 정규직화는 예산과 제도상의 많은 책임이 수반된다. 쉽게 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차제에 비록 작지만 우리 사회의 공조직이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빈틈을 이곳에서 일부분이나마 메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병원장께서 하는 이런 일(?)이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우리 곁에서 꽤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의 여가시간을 풍요롭게 해 줬던 동성아트홀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대표적 개봉관에서도 상영을 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상영 횟수와 기간이 충분하지가 않다. 특히 이곳 대구의 경우 그 횟수와 기간이 서울, 경기, 부산에 비해 훨씬 짧다. 아차하면 꼭 봐야 할 영화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그러다보니 보고 싶은 영화를 비교적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동성아트홀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분이 바로 동성아트홀의 운영자(혹은 후원자)였다. 지금은 영화상영 공간의 문제로 운영이 중단돼 매우 안타깝게 되었지만 아직도 동성아트홀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장소만 마련할 수 있다면 계속 지원하고 싶다며 예술영화전용관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 비쳤다.

예술에 대한 사랑과 곳곳의 빈곳을 채우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디 이분뿐일까 마는 소리 소문 없이, 꽤 긴 시간동안 여러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귀하고 가치 있게 보인다. 빈곳을 채운다는 말이 너무 약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선한 뜻이 좋은 마중물이 되어 우리 옆의 빈곳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물결이 넘실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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