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서 217회 언급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서 217회 언급
  • 김종현
  • 승인 2024.01.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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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나라의 중흥을 보좌한 곽재우
한훤당 김굉필 ‘소학동자’ 별명
1480년 생원시 합격 성균관 입학
이황 “5명의 현인 중 으뜸” 칭해
유가읍 예연서원, 곽재우 배향
젊어서 활쏘기·말타기 연습해
변란 이후 재산 흩어 의병 모집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아
도동서원
“산동곡부(山東曲阜)의 공자님이 이곳 동쪽 서원으로 옮겨 계시게 되었다”는 의미의 도동서원.

◇도동서원에서 올곧음을 찾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서흥김씨(瑞興金氏)로 1454년 오늘날 서울 정릉에서 중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金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산(善山)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소학을 익혔고, 소학에 심취해서 언필칭소학이라고 해서 ‘소학동자(小學童子)’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삼십세(立志)에 비로소 육경을 섭렵하였고, 1480(성종11)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유생으로 원각사 승려의 불법을 들어 척불숭유(斥佛崇儒)를 상소했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은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南部參奉, 경관직 종9품)에 제수되었다. 1496년 군자감주부,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1498년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김종직의 문도붕당(門徒朋黨)을 조직했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와 원방부처형(遠方付處刑)을 받아, 평안도 희천에서 2년간 유배되었으며, 희천에서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전수도 했다. 이후 전남순천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학문연찬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504년 갑자사화가 터지자 무오당인(戊午黨人)이란 죄목으로 순천철물저잣거리에서 참형효수를 받았다.

김굉필이란 검색어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한글번역 200회, 한문원문 181회이나 기록되어 있다. 한글번역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종 2회, 연산군일기 22회나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1481(성종11)년 6월 16일에 “김굉필이 원각사의 중을 심문 처형에 관한 상소하다”에서 마지막 200번째는 1908(순종2)년 1월 8일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며 행실이 곧고 정확하여 백대에 기풍을 남겨 사림들이 우러르고 있다. 행차가 이러한 고장을 지나가니 더욱 감흥된다. 선정(先正)인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사판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1517(중종12)년 8월 6일자로 “김굉필·정여창은 다 어진 사람이다. 그 자손의 녹용은 다른 주죄(誅罪)된 사람의 자손의 예(例)와 같이 할 수 없으니, 각별히 녹용해야 한다. 또 관작(官爵)을 포증(褒贈)하고 처자를 존휼(存恤)하는 등의 일도 아울러 승전(承傳)을 봉행하라.” 1517(중종12)년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강론의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문하생들의 피해로 남곤(南袞) 등 반대세력에서 수정론을 제기했다. 이후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 1557(선조8)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또한 1610(광해군2)년 대간(臺諫), 성균관 유생 및 지방유림이 지속적으로 상소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명을 조선성리학의 오현으로 문묘종사도록 했다. 이황은 김굉필 선생을 ‘도학의 용마루(道學之祖宗)’라고 했으며, 혹은 ‘5명의 현인 가운데 으뜸 현인’이라고 했다. 사실, 무오갑자사화 이후 영남유림에서는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해 왔던 참에 뜻을 모아서 1568년 비슬산 동쪽 유가사 옆 쌍계 골짜기에 쌍계서원을 세웠다. 1573년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1604(선조37)년 외증손 한강 정구가 현재 이곳 강변으로 서원을 옮겨 세웠고, 서원명은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고 했다. 1607(선조40)년 선조는 검정바탕에 흰색 글씨로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담장이 보물 제350호書院)이란 사액을 내렸다. 현재 현판은 나뭇결 그대로 두고 이황의 글씨를 뽑아서 쓴 것(集字)이다. 도동(道東)이란 단순하게 ‘공자의 도가 동으로 왔다’라고 할 수 있으나, “산동곡부(山東曲阜)의 공자님이 이곳 동쪽 서원으로 옮겨 계시게 되었다(仲尼之道,從曲阜移,到在東院)”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낙동강의 강풍이 겨울을 몰아 침입함에 비보(裨補)하고자, 1849년에 현재 수월루(水月樓)를 세웠다. 상량문에는 “푸른빛 산봉우리들이 난간 아래로 들어오고, 수십 겹 병풍처럼 둘려쳐 생동감 있는 그림이 펼쳐진다”는 시구까지 적혀있다. 수월(水月)이란 ‘추월한수(秋月寒水)’혹은 ‘한수조월(寒水照月)’이란 의미를 지녔다. 가을 달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맑기만 하고, 차가운 강물처럼 투철하고 명징한 현인의 심경을 뜻한다. 물론 주자의 “조심스럽게 천년의 마음을 살펴보건대, 가을 달빛이 찬 강물을 비추는 듯, 나의 스승 어찌 한 사람만이 있을까요? 성현께서 전하시는 모두 서책들이 스승일세”라는 시구에서 나왔다.

◇동방예의지국, 일문삼강(一門三剛)의 배움터를 찾아

낙동강 수변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는 화원읍 인흥2길 26번지에 추황(秋篁), 추적(秋適), 추유(秋濡), 추수경(秋水鏡)을 배향하고자 1866(고종3)년 인흥서원(仁興書院)을 건립하였다. 현풍읍 지리744번지 암곡서원(巖谷書院)에서는 곽경(郭鏡), 곽기정(郭基正), 곽한정(郭漢正), 곽자의(郭子義), 곽순종(郭順宗) 등을 배향하고 있으며, 이는 포산사(苞山祠)에서 유래하였으며 2009년 암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유가읍 예연서원이 있었는데 1618(광해군10)년 건립한 충현사(忠賢祠)에서 곽재우와 곽준을 배향하면서 서원으로 승격했다. 구지면에서는1694(숙종20)년에 송담서원(送潭書院)을 건립해 박성(朴惺, 1549~1606)을 배향하고 있고, 1990년에 건립된 화산서원(花山書院)에서 곽승화(郭承華), 곽간, 곽율, 곽재겸 등이 배향되고 있다.

특히 곽재우 홍의장군(紅衣將軍)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역본 217회, 한문본 204회으로 도합 421회이나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다. 선조실록에 84번, 고종실록에서도 1건이나 기록되어 있다. 1592(선조25)년 6월 28일자 기록은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전황보고서(招諭使金誠一馳啓曰)로 “의령(宜寧)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의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라고 상왕에게 상신하는 장계에서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1882(고종19)년 5월 4일자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이 원정략(原情略)을 올리는 글에 “또한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와 같은 신하들은 모두 나라의 중흥을 보좌한 인물 중에 가장 현저했던 사람들이었다(李舜臣,郭再祐等, 皆中興輔佐最著者也)”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글·그림=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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