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일당에서] (2) 호일당 변천사, 70년대 시멘트 담과 70년 넘은 돌담이 공존하는 곳
[호일당에서] (2) 호일당 변천사, 70년대 시멘트 담과 70년 넘은 돌담이 공존하는 곳
  • 윤덕우
  • 승인 2024.01.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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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이듬해인 1951년 목수가 지어
초가 대신 시멘트·슬레이트 기와
디딜방앗간은 서재로 만들어
주변 산자락에는 전원주택이
지난날 급속한 경제성장 이룬
한국 변천사 단면 엿볼수 있어
호일당-텃밭
10년 전 호일당 주변 풍경. 집 앞의 밭에는 2층 전원주택이 들어섰고, 시멘트 블록담 뒤 무너진 농가가 방치되던 곳에도 노출 콘크리트 주택이 지어졌다.
 
고향집-마당
마사토 텃밭으로 바뀌고 있는 호일당 마당.

시골집 호일당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이번에는 그 변모 과정을 보려고 한다. 1951년에 지어진 이 시골집의 변화 역사가 대단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호일당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급속하게 발전하고 변화한 한국(남한)의 변천사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1970년대는 특히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대부분 농어촌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1960년에는 농어촌 인구가 60%를 넘었으나, 이후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도시 인구 비율이 1970년 50%·1980년 69%·1990년 82%로 급증했다. 2010년에는 91%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농촌 소멸, 지방 소멸 문제가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농촌 시골주택은 급속한 변화의 물결 속에 빠르게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시골 농가와 동네의 변화 모습은 주변 여건과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농가의 역사를 대변하는 측면이 있는 호일당 변천사는 필자만이 아니라, 한국 베이비붐 세대 대부분이 겪은 지난날 추억의 단편을 떠올리는 변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곡물 타작마당은 텃밭으로

1951년에 지은 호일당은 주변 마을의 목수가 지었다. 당시 6개 동네가 근처에 몰려 있었는데, 이 지역의 대표 목수가 집을 지었다. 주변 산의 나무를 베어 목재로 사용했다. 마을 주변 산은 다부동(多富洞) 전투 영향을 받은 지역이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힌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벌어진 이 전투 끝에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면서 대구로 진출하려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호일당은 가산과 팔공산이 이어지는 산자락 아래 있는 마을에 있다. 융단 폭격이 가해졌던 치열한 전투가 지나간 이듬해 건립되었다. 그래서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던지, 소나무가 아닌 목재도 적지 않게 보인다. 서까래를 비롯해 구불구불한 목재가 대부분이다.

두 채의 집터에 지은 집인데, 위채와 아래채의 건물 기반은 1m 정도 높이 차이가 있다. 어릴 때인 1960년대에는 초가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당에는 샘이 있고, 농기구와 거름더미가 있는 헛간, 장독대가 있었다. 샘 옆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해마다 감이 많이 열렸고, 나무에 올라가거나 장대를 이용해 감을 따던 기억도 생생하다. 더운 여름이면 샘물을 퍼서 시원하게 물을 등에 끼얹으며 등목을 하기도 했다.

많이 변모했지만, 두 채의 건물은 나무 기둥과 서까래, 황토와 졸대로 된 벽체, 황토 미장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습기로 조금 상한 곳이 있지만, 73년 전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붕은 초가에서 70년대에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그리고 필자가 최근에 들어가 살기 위해 보수하면서 요즘 많이 사용하는 강판 기와로 바꾸었다. 담장은 197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펼쳐진 새마을운동 시기에 일부(골목길 접한 부분)가 돌담에서 시멘트블록 담으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시골집도 비슷한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위채는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방 앞에 마루높이의 툇마루가 있는 구조였다. 방에는 각기 부엌이 있다. 30년쯤 전에 안방과 부엌 부분이 바뀌었다. 기름보일러를 들이면서 나무를 때는 재래식 부엌은 없어졌다. 아궁이 부엌을 메워 없애고, 안방도 툇마루 높이만큼 낮추면서 툇마루는 없애버렸다. 부엌과 안방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리고 부엌 앞에 벽돌을 쌓아 세면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3년 전에 보온을 위해 마루와 안방 앞에 알루미늄 새시 창호를 만들어 달았다. 지금 위채는 기름보일러 방과 대청, 땔감을 쓰는 아궁이 부엌의 온돌방이 함께 존재한다.

부엌이 하나 있던 아래채는 방 2개와 마구간, 디딜방앗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쇠 솥에 소죽이 끓던 부엌도 없어졌고, 마구간에 소가 살지 않은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디딜방아가 있던 방앗간도 그 용도를 잃은 지 오래다. 3년 전 방앗간은 서재로 개조했다. 그러면서 그 뒤편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도 사라졌다. 마구간은 농기구와 농자재를 두는 곳으로 변했다. 방은 큰어머니가 거처할 때 주민들이 모이는 마을 사랑방 역할을 했는데, 당시 연탄보일러 난방시설을 설치하면서 부엌을 없애버렸다. 지금은 연탄보일러 시설도 제거해버렸다.

마당 모습도 많이 변했다. 벼, 보리, 콩 등 농작물을 타작하기 좋은 황토 마당이었으나, 큰아버지가 별세하고 사촌들도 학업이나 출가 등으로 점차 도시로 떠나가면서 그 용도를 잃어갔다. 큰어머니가 홀로 거처하면서 떨어진 감과 낙엽이 나뒹굴고, 잡초가 자라고 연탄재, 빈병 등이 쌓이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마을 뒤에 설치한 수조의 물을 이용하는 수도시설을 사용하게 되면서 마당의 샘물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2021년부터인가는 대구시민이 먹는 청도 운문댐의 물을 사용하는 수도시설이 이 마을에도 깔리게 되었다. 봄이면 귀퉁이에 골담초가 꽃을 피우던 뒤뜰에는 땔감, 짚단 등이 쌓여 있고, 닭이 노닐었다. 그리고 겨울철이면 땅을 파서 무와 김장독을 묻어두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잡초가 자라던 앞마당은 몇 해 전 텃밭으로 변했다. 필자가 입주하면서 넓은 마당 대부분에 마사토를 몇 트럭 깔아 텃밭으로 바꾸었다. 무, 배추, 고구마, 감자, 땅콩, 고추 등이 재배된다. 뒤뜰도 일부는 채소를 키우는 텃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머지 부분에는 골담초,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 국화 등이 자라고 있다.

담장은 일부(대문이 있는 남쪽)를 철제 틀에 방부목 판자를 댄 담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지금은 70년대 시멘트 블록담, 70년이 넘은 돌담, 최근의 방부목 담장이 공존하고 있다.

◇문전옥답과 주변 산자락에는 전원주택이

호일당 주위도 많이 바뀌었다. 대문 앞은 남의 땅이었지만, 그야말로 문전옥답이었다. 벼와 보리가 자라고, 겨울에는 연을 날리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랬으나 벼농사를 안 지은 지 40년 정도 되었고, 이후 밭작물이 자랐으나 몇 년 전에는 2층 전원주택이 들어서버렸다.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한 동제를 지내던 당나무(소나무)도 없어져 버렸다. 동쪽 개울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가 있던, 안산이라 부르던 산의 일부는 10여 년 전에 무참하게 깎여 택지로 변해버렸다. 빨래터가 있었고, 문전옥답에 물을 대던 개울이었는데, 차량이 다니는 도로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겨울에 국민학교(초등학교) 가는 길에 잠시 매서운 바람을 피하게 해주던 산언덕, 그리고 땔감을 마련하던 곳인 그 산자락도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섰다. 불을 피워 밀서리, 콩서리를 해먹던 곳이기도 하다.

호일당 동편의 옆집은 마을의 다른 집으로 이사한 후 폐허 상태로 방치돼 오다, 몇 년 전 외지인이 땅을 구입해 노출 콘크리트 주택을 지어 입주했다. 서쪽 옆집도 오래 동안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 최근에 대구 사람이 구입해 주택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일당이 있는 마을(가좌동·25가구 정도)은 대부분 김씨 일족이 살던 집성촌이었다. 당시 살던 주민은 대부분 그 이후 대구를 비롯한 다른 도시로 떠나거나 연로한 노인만 남아 있다가 별세했다. 그 주민들이 살던 집이나 농사짓던 논밭에는 대구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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