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그 순간,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
[문화칼럼] 그 순간,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
  • 승인 2024.01.1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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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칼럼니스트,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
멋진 남자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 아름답지, 그것을 녹음해서 들으면 과연 그 감동이 처음과 같을까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인터뷰 내용이다. 공연 중 자신의 코앞까지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어느 무례한 관객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나이에 카라얀의 적극적 지지로 무대에 오른 그는 약 반세기 동안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런 커리어를 지속시킬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는 역시 집중력이라고 한다. 연주자에게 집중력이 중요한 것처럼 관객역시 그 순간,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음악에 집중했으면 하는 이야기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 짐본좌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에 대한 일화는 많다. 해외 연주마저 자신의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특히 공연장 관계자들에게 관객들은 상상도 못할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기 일쑤다. 공연장 내 모든 CCTV를 가려라. 리허설 동안 그 누구도 출입하지 말라. 이 정도는 애교에 가깝다. 공연 당일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썩 유쾌하지 못한 안내 방송을 듣기도 한다. 공연 중에는 당연지사고 커튼콜 때도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마라 까딱하면 공연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반 협박성(?) 이야기다. 그래서 극장 관계자들은 그의 연주 중에 노심초사다. 혹시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린다거나 해서 그가 화를 내고 퇴장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다.

이번 대구에서의 공연 중 2부 시작 때 그는 객석 뒤쪽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연주를 시작했다. 후일담으로, 조명 장치에서 나온 작은 불빛이 혹시나 녹음기의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공연 때는 관객까지 긴장하기 일쑤인데 이게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 작용을 하는 역설이 성립되기도 한다. 그의 예민한 자세로 인해 모두가 집중한 가운데 한음이라도 놓칠세라 그의 음악을 감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연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다.

나도 한 때 교향곡이나 소나타 연주 시 악장 사이의 박수가 과연 공연에 그렇게 방해가 되는가?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체코 필의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지난 가을 세묜 비치코프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을 지휘하면서 악장 사이에도 그 팽팽한 질감을 유지하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를 보여줬다. 나는 부끄럽지만 처음으로 그 잠시의 침묵에도 앞서 연주된 악장의 음악이 끝나지 않고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감정은 절대로 영상이나 음반에서 느낄 수 없다. 공연장에 가득한 그 소리의 느낌과 섬세히 다루는 작은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오직 그때, 그곳에서만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오래전 공연장에서 녹음들을 하곤 했다. 물론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오기 한참 전 시절이라 지금처럼 이런 것들에 대한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던 때의 이야기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어렵사리(?) 하나씩 모은 녹음자료는 나에게 그 어떤 기억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공연들에서 받은 선명한 감동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세계적 테너 쥬세페 쟈코미니의 덩어리째 날아오는 그 소리의 첫 충격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여행을 다닐 때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 아니다. 그냥 그날만의 느낌을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 렌즈보다는 그냥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편이다. 그날의 하늘 빛, 피부에 와 닿는 바람결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매일이 같지가 않다. 패키지여행도 사양한다. 혼자 여행지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짜서 다니는 편이다. 물론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현지에서는 고생할 확률이 높아지지만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여행의 만족도를 높인다.

미술관에서 작품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작품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공간과 작품마다 다른데 도슨트가 이끄는 대로 다니는 것을 나는 즐기지 않는다. 물론 설명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보다 작품을 지긋이 응시할 때 나에게 다가오는 질감이 훨씬 충만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기억도 오래간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여행은 현재를 살게 해준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해준다고 한다. 여행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당히 공감 가는 말이다.

낯선 곳에서는 지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마음은 지나간 시간에 머물러 있거나 더 멀리 앞서나가 있는 산만함은 충만한 삶을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지금 마주보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딴 생각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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