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꿈(夢)
[좋은 시를 찾아서] 꿈(夢)
  • 승인 2024.01.17 21: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민경 시인

여행 중이라 쓴다

풀어헤친 머리에 바람을 두르고

돈키호테가 지난 길을 따라서

무딘 발톱으로

존재하듯 존재하지 않는 껍질을 깨고

체온이 저온인 생은

눈 뜨면 꽃이 지고 눈 감으면 비가 내려

달 먹은 호수를 건너면 울음이 떨어지지

미완성 가계도를 열면

빨강머리 엘리스가 맨발로 춤을 춰

강 따위 숲 따위쯤이야

내겐 한 번도 건너지 않은 공중이 필요해

저녁이 노을의 멱살을 끌고 올 때

금 간 시간이 나무 그림자를 찍을 때

나는 제목 없는 책 속으로 금지된 방언을 외며 문을 두드리지

이건 상상이야, 꿈이야

눈동자에 꽂힌 수평선을 박차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저 투명함

그래!

나는 새였어

◇박민경= 부산 출생. 2016 詩전문지 포엠포엠 등단.

<해설> 제목이 이미 꿈인데 내용이 어떻게 변신한들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여행-무딘발톱-저온의 생-저녁노을-눈동자로 건너가면서 결론으로 내뱉는 “나는 새였어”는 진술이 보통 유연한 게 아니다. 돈키호테를 만나고 빨강머리 엘리스도 만나는가 하면 시인은 지상과 공중을 넘나드는 꿈을 꾸는, 능력자임에 틀림이 없다. 망연하게 던져지는 명사 앞에 붙여진 수식어들이 “풀어헤친 머리에 바람을 두르고”, “존재하듯 존재하지 않는 껍질을 깨고”, “눈동자에 꽂힌 수평선을 박차고” “저녁이 노을의 멱살을 끌고” 는 이 시인의 독특한 설명적 언술이거니와 “눈 뜨면 꽃이 지고 눈 감으면 비가 내려/달 먹은 호수를 건너면 울음이 떨어지지”의 직관은 나름 일가를 이루기에 충분한 언술의 극치로 보인다. - 박윤배 (시인)-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