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눈사람
[달구벌아침] 눈사람
  • 승인 2024.02.1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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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겨울이 춥지만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다는 것이다. 어린 날은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였다. 얼음이 얼어야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을 볼 수 있었고, 따 먹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지만 40년 전에는 아이스크림처럼 얼음을 따 먹기도 했다. 마당 앞에 동네 못도 겨울이 되어야 언다. 얼음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추위는 계속 되고, 추위가 계속 되어야 사람이 얼음위를 땅처럼 걷고, 뛰고, 달릴 수 있게 된다. 구르릉 구르릉 소리를 내지만 깨지지 않은 얼음이 언 동네못은 놀이터였고 겨울이 주는 선물이었다.

눈은 자주 내리지 않았지만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펑펑 내려 천지를 뒤덮었다. 마당과 길에 쌓인 눈만 치우고 그 외의 눈은 저절로 녹을 때까지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를 선물해 주는 눈을 어린 홍희는 좋아했다. 경치가 주는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눈은 미술 도구가 되었다. 쌓인 눈을 발자국을 남겨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눈을 모아서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었다. 겨울노래는 항상 얼음과 눈이 등장했고, 눈사람은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친구였다. 추위가 계속 되어야 녹지 않고 오래 볼 수 있는 눈사람친구. 만화에서는 눈사람이 살아서 움직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말을 하거나 옮겨다닐 수는 없지만 어린 아이들의 상상속에서는 살아움직이는 친구였다. 그래서 추위가 계속 되어 녹지 않기를 바랐다. 봄을 좋아했지만 눈사람이 사라지기 때문에 친구를 잃는 슬픔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올해의 겨울은 얼음썰매도 눈사람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추위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목디스크, 퇴행성관절염이 뼈를 시리게 하여 통증이 생긴다. 온 몸을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꽁꽁 싸매고 다닌다. 겨울의 낭만이나 선물은 없이 길어진 어둠이 싫어 동짓날만 기다렸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조금씩 길어져 추위와 어둠에서 점점 해방되어 가는 시점에 다시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1년동안 직장에서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냥 일만 하면 되었다. 일을 하는 것은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일은 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기 때문에 정직했다. 정직한 일이 좋다. 열심히 한 만큼 성취감을 느낀다.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변수가 많다. 아니 정직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탓일지도 모른다. 아들말처럼 홍희는 왜 그들과 친해지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을까? 몇초간 생각을 해보았다. 좋아질 수 없고 좋아지지 않고 좋아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친해지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는 결론을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이 다시 홍희의 공간에 나타난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말이다. 공간을 달리하자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뇌가 띵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혐오일까. 두려움일까. 걱정일까. 가장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 때 느꼇던 스트레스와 힘듬. 그걸 견뎌내느라 애썼던 고단한 정신과 육체까지 침범하는 걸 느껴야 했던 그 때의 상황들과 그들의 얼굴.

첫날밤과 토요일을 온전히 다른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만 생각했다. 아들은 다른 것에 집중하다보면 잊힌다고 하지만 홍희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직면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는 홍희에게 눈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체는 있지만 스르르 녹아내려 없어질 눈사람처럼 그들은 현재의 홍희에게 어떤 힘을 끼치지 못 할 것이라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여기는 그 곳이 아니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고, 홍희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계속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지금처럼 살아가면 될 것이라는 결론. 눈사람같은 그들에게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저절로 곧 녹아내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겨울이 아니고 봄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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