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영화 ‘플랜75’, 초고령사회를 향한 경고인가?
[데스크칼럼] 영화 ‘플랜75’, 초고령사회를 향한 경고인가?
  • 승인 2024.02.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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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뉴미디어부장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5번 2악장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눈앞에 흐릿한 화면이 펼쳐진다. 화면 속 장면이 잔잔한 음악과는 사뭇 다른 충격적인 노인혐오범죄의 현장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라는 나래이션과 함께 가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 “75세 이상 노인이 원하면 국가가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법안 ‘플랜75’가 통과되었다”는 뉴스가 흘러 나온다.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법이 있나 싶다. 다행히도 실제 상황이 아닌 영화 속 이야기다. 일본 영화 ‘플랜75’는 국가가 앞장서서 노인을 죽음으로 안내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는 78세의 미치 씨는 비슷한 연배의 동료가 업무 중 갑자기 쓰러진 후 해고당한다.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그녀에게 주어지는 일거리는 없다.

나라에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플랜75’를 홍보한다. 필요조건은 75세 이상이라는 나이뿐, 건강진단도 가족의 동의도 주민등록도 필요없다. 게다가 신청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만엔, 한화로 약 90만원을 준단다. 단체장례와 화장을 하는 합동플랜을 선택하면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으니 그 돈은 오롯이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다고 저소득층 고령자들을 유혹한다.

담당자는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중단이 가능하다고 설명하지만 콜센터 책임자는 상담사에게 “얘기를 잘 들어주되 결정을 번복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를 한다. 되도록이면 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그들의 업무다. 영화는 플랜75를 통해 안락사를 선택했던 미치 씨가 마음을 바꿔 병원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났지만 듬성듬성 자리를 채우고 있던 중장년층의 관객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우리나라도 내년이면 인구의 20%이상이 65세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있는 만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툭툭 털고 일어나기에는 그 소재가 주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가 않은 탓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5일에는 드리스 판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93세의 나이로 아내와 함께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로 생각했던 안락사가 실제로도 이뤄진다는 것에 놀란 이들도 많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다. 물론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고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안락사(Euthanasia)는 그리스어 ‘아름다운 죽음’에서 온 단어다. 흔히 연세가 많은 분의 장례식장에 가면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죽음 앞에 붙은 ‘아름다운’, ‘좋은’이라는 단어는 불편하다. 나이가 들었다고, 아니면 몸이 많이 아팠다고 그 죽음이 아름답고, 좋을 수야 있겠는가. 물론 당사자의 입장과 가족의 입장은 또 다를 것이다.

올해 88세가 되신 친정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구십 전에는 가야될텐데…. 너무 오래 살면 안되는데….” 그 연세쯤 되면 한두개는 갖고 있는 지병도 없고 혼자서 식사 챙기고 바깥 출입을 할 정도로 정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라도 자식에게 폐가 될까 미리 걱정을 하시는 듯 하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안락사가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일명 존엄사법이라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부터 시행중이다. 이를 통해 본인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치료효과 없이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 유지술 등으로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힐 수 있다.

19세 이상이 되면 보건복지부가 지정하는 등록기관을 통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보관해 놓을 수 있다. 등록기관 정보 등 관련 내용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https://lst.go.kr/main/main.d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연말까지 200만명 이상이 신청했다고 한다.

‘오래 살까봐’ 걱정이 많은 친정어머니는 몇년 전 동네 친구 몇분과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하고 오셨다고 한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지만 오래 산다는 것이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경제력을 갖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선택을 가족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 건강할 때 연명의료에 대해 미리 결정을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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