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시간의 말
[달구벌아침] 시간의 말
  • 승인 2024.02.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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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커피를 내린다. 물을 끓이고 커피콩을 간다. 불안하거나 들끓어 오르는 심장박동수를 진정 식힐 때 쓰는 나만의 방법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나에게 주는 쉼의 시간이다. 신학기 새 책을 받아 들 듯 찻잔을 감싸 쥐고 로댕처럼 앉아 잠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차를 내려 마시는 행위를 통해 식어가는 열정을 데워 시간이 주는 말에 귀 기울여 보는 나름의 아침을 여는 루틴 중 하나다.
마음이 상하거나 지칠 때 알아주는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그 존재가 친구일 수도, 음악일 수도, 또 누군가에겐 꽃소식이 될 수도 있다. '수도'하니까 생각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게 된 어떤 한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포장지에 써놓은 마음을 고백하는 짧은 글이었다.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지만 나의 수도는 당신입니다.'
마음은 아직 지난겨울 풍경 속에 갇혀 있는데 눈과 귀를 먼저 여니 곳곳에서 들려오는 매화 소식에 왠지 모를 조급함이 인다. 창문을 열었다. 극적인 타협의 순간을 맞이한 듯,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처럼 절정이며 반전이 되는 그 순간인 듯 꽃향기가 방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클라이맥스를 어떻게 그려내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잊히거나 기억되느냐가 달라진다고 한다. 음소거 하듯 불안과 불합리한 기억은 잠시 접어두고 이 순간 온몸을 휘감아 도는 매향에 취해본다.
일요일 새벽이면 달성공원 앞에는 번개시장이 선다. 번개처럼 잠깐 섰다가 반짝 사라진다. 수많은 좌판이 우산을 펴고 접듯 어찌 그리도 빨리 펼쳐졌다가 금세 접히는지 매번 신기하다. 걸어온 시간과 같다. 시장이 사라지고 나면 아이를 데리고 달성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출입문을 조금 비켜난 왼쪽 담벼락을 기대고 선 자판기 몇 대가 우리를 반긴다. 네 살배기 손자가 먼저 알고 뛰어나간다. 딸에게 카드를 넣으라는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숙인 채 입구를 빤히 쳐다보며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뒤로 줄 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가 나오기도 전 손으로 뚜껑을 들었다 놨다 하며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닫힘 버튼이 열림 버튼보다 훨씬 더 많이 닳아 있다. 비닐이 벗겨진 채 닫힘이라고 인쇄된 표시마저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많다. 승강기에 오르자마자 문이 닫힐 때까지 굴삭기로 땅 파듯 닫힘 버튼을 쪼아대는 사람들을 곧잘 만난다. 굳이 누르지 않아도 닫힐 텐데 그새를 못 참고 눌러대는 것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내남없이.
우리사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빨리빨리 문화'라고 말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데로 빨리 처리가 안 되면 화부터 내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한다. 그러다보면 사소한 문제로 인한 마찰을 빚게 되곤 한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자극이 오면 일부러 반응을 늦게 해 보라. 하나, 두울, 세엣, 이삼 초 뒤에 반응하라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그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은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든 무엇이든 바로 대응하지 않고 잠시 멈춰보는 일, 다른 달에 비해 몇 날이 조금은 모자란 이월엔 자극에 천천히 반응해 보기로 한다. 즉답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요리가 더 맛있어지는 건 불을 끈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식은 다음이라는 말,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소고깃국과 미역국 등 데우면 데울수록 맛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 별식으로 해 먹는 카레는 끓인 다음 날이 더 맛있다. 그 맛에 취해 더 먹고 싶다고 느낄 땐 이미 국솥은 바닥을 드러내며 텅 비어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 번쯤 식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은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니러니하게도.
글을 모르는 네 살배기 손자와 글을 아는 내가 가끔 그림책을 함께 볼 때가 있다. 손자가 그림에 손가락을 가리키는 동안 나는 몇 줄의 글자에 집중하게 된다. 아이가 천천히 그림을 살피는 동안 글을 금방 읽어버린 나는 얼른 책장을 넘기고 만다. 그럴 때면 '글자를 빨리 배우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왜냐면 글을 한번 배우고 나면 그림을 자세히 보려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은 선 하나도 꼼꼼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잃고 나면 정만 중요한 걸 놓치기 쉬울 테니, 이맘때쯤 느껴지는 봄날의 풍경이 펼치자마자 덮어야 하는 짧은 동화책만 같아 아쉬운, 기다림이란 단어가 마치 기적과 같은 뜻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 이월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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