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숙종과 인현왕후
[류동학의 세상읽기] 숙종과 인현왕후
  • 승인 2024.03.0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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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사적 198호인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실 왕릉으로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말하며, 그밖에 다른 원과 묘도 함께 있다.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昌陵), 19대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明陵), 21대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차례로 조영되었다.

서오릉에는 5기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인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의 묘 순창원(順昌園), 21대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묘 수경원(綏慶園), 20대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 대빈묘(大嬪墓)가 들어서 있다.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의 여인들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희빈장씨의 릉과 묘가 같이 있어서 생전의 숙종과 여인들의 삶의 괘적과 달리 사후에 같이 동거하고 있다. 한편 대빈묘(大嬪墓)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위치하였으나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사극에서 인현왕후와 희빈장씨는 라이벌관계와 서인과 남인과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선악의 인물로 자주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노론의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고 사씨남정기,인현왕후전과 미나리와 장다리의 민요의 영향도 크다. 이것을 명리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인현왕후는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1월 23일 기사의 기록에 의하면 1667년 음력 4월 23일 오(午)시생으로 한성부 반송동 사저에서 민유중(1630~1687)과 그의 첫 번째 계실인 은진 송씨(1637~1672) 사이의 넷째이자 적차녀로 태어났다. 사주는 정미년 을사월 정묘일 병오시생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이른 나이에 승하하면서, 숙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이후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폐위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5년 만에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폐비 시절 김천 청암사 등에 머물면서 복위운동을 전개해 생전에 복위한 유일한 왕비로 유명하다.

본관은 여흥, 가문의 당적은 외조부 동춘당 송준길이 효종~현종 때 당수를 역임했던 서인 산당이었다가 1683년경 노소분당(숙종 7년~숙종 10년)으로 일제히 노론이 됐다. 부친은 민유중으로 노론 정치인 명성황후의 5대조이자 순명효왕후의 6대조인 민진후와 민진원은 오빠들이다. 증조부 민기는 선조때 우의정, 조부 민광훈은 관찰사였다. 백부 민시중(친일파 민영휘의 7대조)과 중부는 좌의정 민정중이다. 부친과 형제들은 모두 율곡-사계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우암 송시열의 문하생들이다.

이 사주는 근본적으로 ①사(巳)화의 월지가 겁재인 월겁격(月劫格)사주이다. 한편 지지가 사오미(巳午未)의 화국(火局)으로 천간은 ⑤정(丁)화 비견, ⑥을(乙)목 편인, ⑦병(丙)화 겁재로 사주전체가 목화기운이 강한 편인(偏印)과 비견(比肩)과 겁재(劫財)로만 이루어진 염상격(炎上格)사주이다. 염상격은 사주천지가 수기와 금기가 전혀 없고 오직 화와 화를 도우는 목으로 이루어진 사주를 말한다. 염상격은 일행득기격(一行得氣格)의 부귀격사주로 예의 범절이 바르고 그릇이 크다, 그러나 수기가 부족하여 기혈순환이 안되고 염증이 자주 발생한다. 인현왕후의 사인은 종기와 부종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한의학에서는 '옹저'라고 부르는데, 악성 종기로 생각하면 된다.

염상격은 운을 보는 법이 일간인 화가 용신으로 일간을 도우는 목과 화와 토를 희신과 용신으로 잡고 수(水)와 금(金)을 기피하는 기신(忌神)과 구신(仇神)으로 본다, 초년 병오대운(7세이후 16세)은 용신운으로 길운이다. 이 시기인 1681년 신유년(辛酉年) 16세에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서인의 거두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로 뽑힌다. 그녀는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상헌의 현손이자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음 정미대운(17세이후부터 26세)도 길운이다. 그녀는 을목과 묘목의 편인(도식)이 강하여 아이가 없었으나 라이벌인 희빈장씨는 숙종의 첫 아들인 왕자 윤을 생산하여 나중에 경종으로 즉위한다.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으로 조정은 남인들이 차지한다. 그 이후 숙종의 독단으로 인현왕후는 페위된다. 인현왕후는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집권하면서 왕후로 복권된다.

1700년 통풍이 발병하여 35세인 1701년 신사년(辛巳年) 8월14일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라이벌 희빈 장씨는 같은 해 음 10월 10일 자진하여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악연은 끝이 난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숙종의 정치적인 야망과 남인과 서인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그녀들의 삶이 파란의 연속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비정한 정치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숙종시기의 환국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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