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치유의 글쓰기
[치유의 인문학] 치유의 글쓰기
  • 승인 2024.03.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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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삼 대구한의대 교수
밤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고 새벽이라는 선착장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머리가 복잡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날 새벽, 무심코 종이위에 써내려간 글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삶의 의미와 생존의 이유를 발견한다. 어쩌면 나의 글쓰기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주는 숨겨진 보석일지 모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1592년 1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7년 전쟁사를 기록한 장군의 개인 기록물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문학적, 군사적 가치까지 담겨있는 국가적 보물이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일종의 망루성격인 한산도 진영의 ‘수루’에 앉아 여러 가지 상념을 그대로 드러낸 자기 독백적 시는 명장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보게 하는 자기 성찰적 일기다. 장군께서 시를 통해 전쟁 중 자신의 마음을 위로 받았다면 정유년 음력 4월 초하루 난중일기의 기록은 백의종군 첫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장군이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만약 장군에게 글쓰기가 없었더라면 끝없는 절망과 좌절의 현실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4월 1일 날씨 맑음. 옥문을 나왔다. 필공을 불러 붓을 다시 메었다”

이 한 줄의 문장이 427년 전 쓰러진 조선의 역사를 일으켰고 벼랑 끝 이순신을 다시 일어나게 했다. 장군이 쓴 한 줄의 글이 60년 필자의 신념이 되었다.

또 독립 운동가이면서 정치가인 백범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일지’도 이순신의 난중읽기를 닮았다. 상하 두 권으로 나눠진 일기 형식에서는 백범선생님의 성장과정은 물론 다양한 자신의 경력과 나라를 생각하는 비공식적인 활동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과장이나 수식어 없이 칼칼하게 기록된 백범선생님의 글 속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백범선생의 마음을 손살피처럼 들여다 볼 수 있다.

전쟁 중에 탄생한 난중일기와 어지러운 국가상황에서 빛을 본 백범일지 이 책들은 시련의 씨줄과 고통의 날줄이 빚은 긍정의 바이블이다. 도저히 일기를 쓸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열할 정도로 일기를 썼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자신의 성찰은 물론 자신의 신념을 끝없이 닦아 나간 치유와 정화의 시간적 결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2001년도 영화 <시>를 보면 주인공 미자(고 윤정희 분) 손자가 같은 동급생 16살 소녀를 강간한다. 절대로 시를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시를 배우는 영화 속의 주인공 미자.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실에서 그녀가 배우고 쓰는 ‘시’는 순수를 찾아 주고 중심을 찾아주는 영혼의 치유 같은 의식이다.

또 피터 위어 감독의 1990년 대표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 시에 대한 정확한 의미가 나온다.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우리가 종이위에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시와 일기는 어쩌면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아닐까?

미국의 전설적인 소설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에는 85세의 늙은 노인이 나온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이 85일째는 고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묵묵히 바다로 나간다. 400여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청새치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독백을 통해 우린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사를 가슴에 담는다. 85세 노인의 독백은 결국 헤밍웨이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생의 가장 위대한 ‘한 줄 어록’이다.

이순신과 백범의 일기,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자와 키딩 선생의 ‘시’가 하는 이야기는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노인의 독백 ‘나는 결코 포기 하지 것이다’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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