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국 시인의 디카시 읽기] 박언숙 시인 '단절'
[강현국 시인의 디카시 읽기] 박언숙 시인 '단절'
  • 승인 2024.03.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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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협상이 결렬되었군요

허공을 후려치던 현수막

악착같이 매달리는 말꼬리

싹둑싹둑, 혀를 잘라내자

말문 닫고 침묵시위 중인가요

<감상> 을씨년스러운 풍경입니다. 너덜너덜한 전깃줄이 얽히고 설킨 전봇대는 한 발짝이 멀다하고 만나는 흉물입니다. 협상, 결렬, 현수막, 말꼬리, 시위 등의 어휘들이 소환하는 장면 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또’ 만나는 살벌한 사태입니다. “악착같이 매달리는 말꼬리가 혀를 잘라내어 말문이 닫히는 침묵시위”는 죽임의 시위입니다. 말문이 닫힌다는 것은 마음의 호흡이 멎는다는 뜻이니까요. 문제의 심각성은, 죽임으로 치닫는 침묵 시위가 붉은 머리띠의 노동현장을 넘어 현대인의 보편적인 일상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노사(勞使) 사이의 결렬된 협상은 법을 통해 타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만 ‘싹둑싹둑 혀를 잘라내는’ 언어로 말미암은 인간관계 결렬은 그 해결의 실마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할 것은, 너덜너덜한 전봇대는 도시미화 차원에 한한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황량한 세태 전반을 함축하는 제유(提喩)라는 것입니다. <단절>이 전하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예삿일이 아닌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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