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넌 남편, 난 네 편
[달구벌아침] 넌 남편, 난 네 편
  • 승인 2024.03.2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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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오래 입어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 닳고 닳아 무릎이 툭 튀어나온 수면바지처럼 아무리 새것이 좋다고 해도 몸과 마음을 제대로 기댈 수 있는 건 오래되고 익숙한 것들이 아닐까. 마음 맞는 친구나 입에 맞는 음식처럼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건 시간의 도움을 받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옷부터 갈아입는다. 그럴 때 입는 옷은 거의 보풀이 일거나 색이 바란 낡은 것들이다. 죽은 듯 보이나 죽은 게 아니고 메마른 듯 보이나 그 속에 어떤 꽃 같은 날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드라이플라워 같다.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밖에서 따라온 긴장감이 풀리면서 진짜로 귀가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낡아도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내 몸에 맞춰져 적당히 늘어나고 헤진 부분과 안락함이야말로 세상 어떤 것에서도 쉬이 구하기가 어렵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야 비로써 갖게 되는 안온함이 느껴진다.
찐, 사랑이란 말보다는 행동이라 여기는 편이다. '사랑한다.'는 천만번의 말보다는 머리맡에 앉아 아프거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이마 위에 손수건 내밀 듯 물수건 한 장 올려준다거나 팔을 벌려 등을 토닥여주는 일이다.
안방 티브이 앞, 진열된 가족사진 속에는 네 식구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한 채 웃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남편과 딸, 나와 아들이 붕어빵처럼 닮아있다. 딸이 아버지를 닮으면 잘 산다는데…. 그 말이 조금의 위안을 준다. 나를 닮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집가기 전까지만 해도.
가끔 딸내미랑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남편과 마주 앉아 하는 말 같아 언짢아질 때가 있다. 특히 남편과 다툰 후 '아빠랑 옳거니 닳거니 했다'며 시집간 딸에게 속내를 토로하곤 하는데 위로라며 한다는 딸내미의 말은 남편이 내게 한 말과 거의 흡사하다. 내 편을 들어줄 거로 생각해 한 말인데 아빠 편만 드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에 입을 열기가 무섭게 '네가 하는 말이 우째 느그 아부지하고 똑 같노'라며 딸의 입을 막아설 때가 잦다. 결여된 협상처럼 극적 타협을 꺼내지 못할 때가 많다.
자식들 모두 떠나보낸 후, 더 가까워질 줄로만 여겼던 방과 방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출가시키면 그만인 줄 알았던 자식의 자식인 손주들이 멀어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앉는 까닭이다. 끝난 줄 알았던 나의 육아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언제쯤이면 끝날지 답을 모른다. 꽃이 피고 지듯, 계절이 가고 오듯. 오늘만 사는 것처럼 현재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나눠 줄 것이 있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몸은 낡아도 마음은 낡지 않기를, 젖은 날, 우산은 접어도 꿈은 접지 말기를 다시, 꿈꾸어보는 생의 반을 넘어 맞이하는 새로운 봄이다.
휴일 대낮, 피곤함에 쩐 그늘을 말리느라 그가 침대 위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다. 끼니도 거르고 씻지도 않은 채 온종일 잠에 취해있다. 가끔 마당 가, 목련꽃 피고 지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는 걸 보면 잠결에도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듯 긴장을 내려놓지 못하는 듯하다.
신혼 시절, 겨울비 내리는 늦은 밤이면 퇴근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까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가곤 했다. 한 손엔 우산을 받쳐 들고 또 다른 한 손은 그의 호주머니 속, 깊숙이 찔러 넣는 채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옛 추억이란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호주머니 속에서 한데 섞여 맞잡은 손의 온기만은 지금껏 식지 않고 남아 지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삶을 따뜻하게 데워주곤 한다.
호주머니가 없는 옷이나 앞치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넉넉한 크기의 호주머니가 달린 옷을 나는 좋아한다. 디자인이나 색이 맘에 더 들어도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하는 기준은 늘 한결같다. 호주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를 우선순위로 둔다. 남편은 나의 호주다. 호주는 한 집안의 가장이며 한 가정을 끌어나가는 사람이다. 수의에는 없는 호주머니처럼 나의 호주는 늘 머니가 없다고 말한다. 늘 비어있다. 뒤집으면 먼지만 나온다는 어리광을 피운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꿈을 억누르고 사는 그는 모든 게 돈으로 귀결된다. 그럴 때마다 시시포스처럼, 호주머니라는 단어 속 호주(戶住)는 머니(money)를 평생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이 느껴져 그가 애틋해진다.
가장이라는 틀의 감옥에 갇혀 난전 한편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천막처럼 비록 후줄근하게 낡긴 했어도 남편은 남편이다. 남의 편이 아닌 내 편이다. 호주머니가 달린 보풀 인 바지다. 저녁이 되어 한잠 자고 난 그가 땀에 쩐 후줄근한 옷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가장이란 견장 어깨에 두른 채 집을 나선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 뒤로 가로등 불빛이 얹힌다. 달빛이 나란히 따라 흐른다.
"허공 가득/ 밤새 누가 다녀갔을까?/ 새색시 시집가듯/ 눈 온 다음 날 아침/ 맨 처음 찍힌 발자국처럼/ 목련이 지고 있다// 새벽 강으로 그가/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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