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 은사
<팔공시론> 은사
  • 승인 2009.03.3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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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열 (성형외과 원장, 의학박사)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훌륭한 스승이 두 분이나 있으니 말이다. 피부과 원로인 서순봉 선생님은 작년에 돌아가시고 히라야마 선생님은 아직 일본에 살아 계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레지던트 두 번 그리고 미국에서 1년간의 연구원까지 긴 시간을 공부한다고 돌아다녔지만 스승의 날이라고 해도 그냥 의례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다 훌쩍 40이 넘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이 분들의 은혜가 정말 크다는 마음이 들었다.

선친이 교원이셨던 터라 어릴 적부터 아버지 제자들이 자주 집에 와서 자고 가거나 식사를 하는 것을 봐와서 학교 제자라면 누구나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필자는 선생님 집에 가서 자기는커녕 밥 한번 같이 먹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신 모친은 늘 네 부친이 별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선친의 옛 제자 분들과 간혹 전화도 하고 환자도 소개받으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옛날 도제교육 시대에는 무협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부님과 제자의 관계로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지만 우리가 교육받던 시대에는 한 사람의 선생님과 5,60명에 이르는 학생이었던 관계로 이러한 감정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가 되고 레지던트가 되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물론 친소의 감정이 있어 친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소원한 관계도 있지만 대체로 학생 때와는 다른 것 같다. 전공의 초기에는 피부과 교수님들과 별로 친밀하게 보내지 못했다.

특히나 주임교수이신 서순봉 교수님과는! 선생님에 대한 불만도 있고 전공의 이후의 진로 문제로 인해 친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불편하고 기피하는 소원한 관계였다. 그 후 일본에서 성형외과 레지던트를 하다 보니 자연히 양 쪽의 선생들이 비교되었는데 서 교수님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나 연구하는 자세가 회상되면서 새삼 그 분만한 사람이 드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 일본인 교수에게 당신의 옛 제자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도리어 전공의 시절보다 더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라야마 선생님 밑에서 레지던트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친하게 된 계기는 이보다는 선생님의 출장 수술에 조수로 따라가게 된 것 때문이었다.

일본의 많은 종합병원 의사들은 대개 일주일에 하루는 개인병원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진료를 하고 그 수입을 자기의 고정된 매월 수입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대세이다. 요즘에는 국립대학에서 이를 다소 금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다.

하여튼 매월 토요일은 출장 수술하는 날이라 도쿄 시내의 병원이나 도쿄 근교인 사이다마 현 혹은 군마 현의 지방도시에까지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4,5년 이상을 선생님과 함께 다녔다. 보통 아침에 출발하여 밤늦게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따라서 자동차나 기차 안에서 인간적인 면을 잘 볼 수 있었다.

일본 말을 비교적 빨리 습득할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과 긴 시간 동안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귀국 후에도 매월 달이 바뀌면 전화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면 항상 대화 끝에 고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한동안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요즘 필자에게서 수련 받았던 사람들이 전화를 하거나 명절 때 찾아오면 언뜻 고맙다는 말이 나오려고 하여 그 때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가 든 탓인가? 그 전에는 전혀 그런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고맙다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자주 써봐야겠다. 둘째 아이가 얼마 전까지 일본에서 일본 치과 의사국시를 재수하고 있었는데 간혹 전화로 격려해주시고 집을 구할 때 보증인도 되어 주셨다.

며칠 전 금년 국시 합격의 소식을 전하였더니 흥분하여 그 자리에서 축하의 식사 약속을 잡았다고 아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본인들은 대개 `혼네’ 니 `다테마에’ 니 하며 자기의 본심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사무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분은 항상 `혼네’로만 이야기한다. 미국에 연구원으로 가 있을 때 고생한다고 헤어지면서 편지 속에 300달러를 넣어줄 정도로 인간적인 면이 있는 분이다.

귀국 시에는 당신의 싸인 이 든 액자 크기의 사진을 주시 길래 왜 주시는가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병원진료실에 걸어두었다가 지금은 수술실로 옮겼고 피부과 서 선생님의 사진도 또 다른 방에 걸어 두고 있다. 경험에서 이미 사용처와 필요성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지금 83세 로 상당한 나이지만 당신의 은사는 97세로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있어 자기 자신이 나이든 노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분이다. 벌써 개나리가 꽃피는 봄이다, 3월도 거의 끝나 가고 다음 주면 4월이다. 전화를 드려야 할 시간이다. 언제까지고 전화를 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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