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 두 가문의 힘든 선택
<팔공시론> 두 가문의 힘든 선택
  • 승인 2009.04.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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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로 (논설위원)

사백년 동안 끌어오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그 후손들에 의해 타결되었다 한다. `병호시비’는 호계서원(虎溪書院)에 퇴계 선생과 함께 제사할 인물로 그 제자인 류성룡(柳成龍) 선생과 김성일(金誠一) 선생 중 누구를 윗자리에 모실 것인가에 관련된 논쟁이었다. 즉 퇴계 선생의 위패 왼쪽에 누구의 위패를 세우느냐는 것이다. 이는 하회 류씨와 의성 김씨의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대표적 유학자인 퇴계 선생의 수제자를 결정하는 문제였기에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

퇴계 선생의 많은 제자 중에 이 두 선생을 으뜸으로 손꼽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류성룡 선생은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선조 때 주요 관직을 거쳤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적 위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학문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영의정이라는 최고 관직에까지 올랐으니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김성일 선생은 류성룡 선생에 비해 나이도 세 살 많고 학문과 인품에서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이조와 병조 좌랑을 거쳐 높은 관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자주 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의병 활동에 적극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관직은 류성룡 선생에 비해 낮았지만 뛰어난 학문과 올곧은 선비로서의 인품은 퇴계 제자 중 으뜸으로 평가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한다.

결국 누구 한 사람을 수제자의 위치로 높일 것인가 라는 것은 후손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스승이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존경받는 것은 제자들로서 더 없는 영광이었다.

사회적 지위로 보면 류성룡 선생이 더 높고 학문과 인품으로서는 김성일 선생이 한 수 위라는 후손들과 제자들의 입장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이 논쟁은 영남지역 모든 퇴계의 제자들을 두 계열로 나뉘게 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그 두 선생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으면 선비라고 불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유학자들은 학문과 인격 수양을 통해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즉 학문을 통해서 안으로는 성인군자의 도덕적 품성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현실에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라 현실 정치에서 이름을 드높인 류성룡 선생이나 그에 못지않은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인품과 학문에서 높은 평판을 거두었던 김성일 선생이나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성취 가운데 무엇을 더 높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두 가문과 그 후학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치열하게 논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니 단순한 힘겨루기와 명분 싸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농민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주원장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유학자들을 대거 숙청하였고 또 그 아들 영락제가 황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그를 비판한 유학자들을 다시 숙청한 뒤 사실상 유학의 정신과 맥이 끊어져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유학의 전통을 이은 것이 조선의 퇴계 선생이었다고 할 때 그 학통을 계승하는 문제를 두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유례없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유학자들의 당파 싸움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병호시비’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스승이 어디 있는지. 스승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그분의 윗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이 또 어디 있는지 의문이다.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스승이나 많은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정치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두 가문이 늦게나마 호계서원의 복원을 앞두고 이 어려운 문제에 합의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를 계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이 두 선생이 더욱 존경 받게 되고 가문의 명망이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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