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의 책 한 권
내 손의 책 한 권
  • 승인 2013.01.1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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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대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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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이 내 손에 있다. 책은 내 손에 적절한 크기와 무게, 질감을 갖고 있다. 나는 책을 눈으로 읽기 전에 먼저 손으로 읽는다. 한참동안 책을 쓰다듬으면서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음미한다. 새 책이다. 주르륵 책갈피를 넘겨본다. 종이냄새와 잉크냄새가 묘하게 어울리면서 책은 이제 냄새로도 교감이 된다. 세련된 서체로 다듬어진 활자들이 깔끔하게 줄을 서 있다. 때로는 책을 읽을 때보다 책을 만지는 이 때가 더 즐겁다.

표지와 간지 디자인, 목차 구성과 저자에 대한 소개는 다시보고 또 보고 할 것이니, 제 1장 첫 쪽 첫 문장부터 읽기를 시작한다. 설렌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헉, 첫 문장이 주는 이 충격에 한참을 머무른다. 마음은 더 머물러 음미하고 싶은데 눈은 벌써 몇 줄 아래를 읽고 있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 때부터 한 구절, 한 구절을 씹고 되씹어 책을 천천히 읽고 싶은 욕구와 내 속에 없던 신선한 새 구절을 빨리 읽어나가고 싶은 욕구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생겨난다. 상반되는 두 가지 욕구는 적절히 타협하고 적절히 갈등한다. 글쓴이의 문체에 익숙해지면서 읽기의 속도가 점점 더해진다.

이쯤에서 나는 책을 잠시 덮는다. 저자의 ‘영혼의 지문’과 같은 이 구절들을 너무 쉽게 읽어나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빨리 읽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잠시 읽기를 멈춘다.

책을 읽다보면 내 속에 어렴풋하게 있던 생각들을 저자는 얼마나 명쾌하게 표현해 놓았는지 저자가 나보다 더 나답게 느껴진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나 사이엔 긴장과 갈등과 격동이 지속된다. 책과 밥만 있으면 몇 달은 이 겨루기를 즐기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달에는 ‘레 미제라블’을 읽고 있다. 500쪽 짜리 다섯 권이니까 족히 2,000쪽이 넘는다.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그 부피가 기분 좋다. 어린 시절 동화로 읽은 얇은 ‘장발장’이 어른이 되어 내 삶이 복잡해지는 만큼 얘기도 풍성해져서 책이 이렇게 두꺼워진 것 같다.

외국문학 책은 번역본으로 읽게 되니 작가의 세밀한 문체의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쉽기는 하다.

거기에다가 원전과는 차이가 나더라도 우리말로 읽기 쉽게 의역을 한 ‘부정한 미녀’ 스타일이 아니라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한 ‘정숙한 미녀’ 방식의 글은 문장이 낯설어서 읽기가 곤혹스럽다. 그런데 이 낯섦이 글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단어와 단어가 낯선 조합을 이루어 부자연스럽지만 묘하게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주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은 영화와 뮤지컬로도 보았다. 책도 좋지만 영화나 뮤지컬은 또 그 나름대로 좋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등장하여 온갖 일을 겪는 엄청난 이야기를 두 시간 남짓한 제한 속에 압축해 넣으면서도 상상을 넘어서는 영상과 사운드,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느낌을 음악과 춤에 담아 내 눈 앞의 무대 위에서 보여주니 참으로 놀랍다.

영화와 뮤지컬을 보고 난 후 책을 읽으면 얼핏 스쳐서 대충 알고 있던 소설 속 주인공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알고 친해지게 된다.

장발장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미리엘 주교는 공연이나 영화에서 3분도 채 나오지 않지만 책에서는 무려 100쪽이 넘게 소개된다. 책을 읽는 동안 미리엘을 자세히 알게 되고 그의 성격과 인품이 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뮤지컬에서는 ‘Who am I?’라는 노래로 압축된 장발장의 고민과 결론이 책에서는 무려 5시간 동안 밤이 새도록 방에서 서성이는 장발장의 고뇌와 결정의 과정으로 서술된다. 미혼모 팡틴은 슬픔과 비탄,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로만 영화에 나오지만 책에서는 한 때 잘 나가는 총각들과 어울려 감미로운 연애를 즐기던 모습에서부터 그녀의 몰락과 하강까지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책을 다 읽었다. 다 읽은 책을 만지고 있으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뿌듯한 충족감에 휩싸인다. 며칠 동안 이 책을 들고 다닐 것 같다. 식탁에서도 침대에서도 때로는 산책할 때도 들고 다닐 것 같다.

그런데, 책 읽기는 마냥 즐거운 것일까? 천만에. 아무 감동도 없이 그저 인내심만 키워주는 책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책도 책이니까 읽을수록 좋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책 읽기보다는 ‘개그 콘서트’ 재방송 보기를 훨씬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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