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양심
예술가의 양심
  • 승인 2013.02.11 13: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현묵 수성아트피아 관장
/news/photo/first/201302/img_89139_1.jpg"/news/photo/first/201302/img_89139_1.jpg"
예술가는 나약하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다. 오늘날과 같은 기업국가시대에 권력과 돈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학교 선생이 힘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옳다, 혹은 바른 길로 가라고 해도, 아이들은 잔소리로 듣고, 어른들은 철없는 노인네 취급을 한다.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나 화가라 하더라도 관청의 하위직 공무원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듣고, 반드르르한 양복을 입은 기업인이 권하는 폭탄주에 주책없이 취한다.

그러나 예술가가 아무리 나약하다 해도,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다. 특히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모두 누리는 사람도,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부족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부족은 다름 아닌 본원적인 정신의 갈증이다. 그것이 비록 허영과 과시의 형태를 띄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본원적 갈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권력/자본가와 예술가가 만난다.

예술가가 권력/자본가에게 복무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근대 ‘예술의 자율성’과 익명의 소비자에게 ‘작품의 직접 판매’가 이뤄지기 이전 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왕과 귀족들을 위하여 복무했다.

음악가는 그들을 위해 작곡을 하고 연주를 하였으며, 연극인은 그들을 위해 대본을 쓰고 연기를 했다. 화가들은 그들을 위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시인, 무용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모차르트가 찰스부르크 대주교의 후원을 거부하고 비엔나로 간 것이 역사상 거의 최초의 권력/자본가와 예술가의 결별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모차르트에게 주어진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런 장례 절차도 없이 성 밖 공동묘지에 던져진 것이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예술가가 권력/자본가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부터다. 즉 작가, 화가, 연극인들이 특정인에게 자신의 작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다수 소비자들에게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할 때부터다.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의 천재성이 미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니라, 질서를 뛰어넘는 직관의 진실로 인정되기 시작하고, 또 리얼리즘의 시대로 넘어 오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이 가능해지면서, 예술가는 시대와 현실을 뛰어넘는 예언자이자 통찰력을 가진 현인으로까지 승격된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 창작할 뿐, 그 누구로부터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게 된다. 이른바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의 원작자인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 그리고 발자크와 에밀 졸라, ‘전쟁과 평화’ 의 러시아 작가 톨 스토이, ‘올리버 트위스트’ 의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가들 역시 왕과 귀족의 초상화 대신 농민이나 서민 대중들의 모습과 삶의 현장 등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음악가들 역시 틀에 짜여진 화성법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개성을 담은 비조성 음악 혹은 민족음악으로 나아갔다. 아방가르드 운동 역시 이러한 변화의 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예술가들의 자율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급속히 진행된 대량 자본주의의 물결, 그리고 지나치게 나아가 작가주의가 예술을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는 시,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음악, 광기와 절규로 가득찬 실험극, 장난과 즉흥에 기댄 현대미술… 그 사이로 대중예술이 파고들었다. 대중들은 예술가 저들만의 자의식에 가득찬 난해한 순수예술을 떠나 달콤한 선율의 대중음악, 말랑말랑의 영화와 TV드라마,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길거리 댄스,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디자인의 세계로 가버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예술가들이 기댈 곳이 익명의 대중이 아닌, 지원금을 제공하는 관청과 대량 구매가 가능한 기업으로 한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형식과 모양만 바뀌었지, 과거 왕과 귀족에게 후원을 받고, 그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은 한때 누렸던 예언자와 현자의 역할을 고스란히 내려놓게 되었다. 한때 누렸던 그 고상한 지위와 권위는 이제 추억처럼 회상할 뿐, 이제 예술가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창작의 자유를 누리기에는 자본의 힘은 너무 거대하고, 권력의 영향력은 너무 촘촘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갑자기 예술가의 양심 혹은 자율성을 거론하느냐,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그저 단순하다. 조만간 대구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이름을 딴 음악축제가 벌어지는데, 그가 바로 스페인 프랑코 독재를 분연히 거부하고 저항하였을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음악활동마저 저버렸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그렸듯이.

그에 비하면 지금 나의 모습은 너무 우울하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