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며
버스를 기다리며
  • 승인 2013.02.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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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계명대 경제금융학과 교수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낭만적이다. 여기에서 나는 낭만이라는 말을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의 노랫말에 나오는 그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노래 속에서 낭만은 잃어버린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의 몸은 하릴없게 된다. 옆에 함께 서 있는 어린 학생처럼 스마트 폰을 꺼내들고 만질 일이 없으나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내 몸의 하릴없음으로 인해 온전한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때 낭만적이 된다. 하릴없음은 오랫동안 내가 잃어버린 몸의 감각이다. 무엇인가에 바쁘게 쫓기어 살면서 나는 내 몸이 가만히 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하릴없는 나의 몸의 감각을 느끼면서 낭만에 빠진다.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대화에서 묻어나오는 거친 욕설들도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욕설들에서 배설의 욕망을 발견한다. 억압된 배설의 욕구를 그들은 그렇게밖에 해소할 수 없으리라.

무릇 젊은이만이 생명의 바닥에서 용솟음치는 배설의 욕망을 겨워하는 법. 배설에 대한 욕망은 더 이상 나에게 절절한 것이 되지 못한다. 대신 나는 세상을 향해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이 무심코 쏟아내는 배설의 찌꺼기를 통해 나는 이미 길들여져 시들해버린 나의 욕망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며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혹은 낭만에 대하여 그리워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문득 대학시절에 읽었던 신동엽의 시를 기억해낸다. 아직 우리에게 꿈꾸는 현재는 오지 않았다고 외치던 폭풍노도의 시절, 마치 어느 동화에 나오는 듯 한 나라의 이야기를 읊은 ‘산문시1’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 곳에는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고,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간다. 아무래도 이 시의 클라이막스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는 장면이라 해야 할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왜 오랜 동안 잃어버렸던 이 시를 갑작스럽게 떠올렸을까. 아마도 보수적인 문학인으로 자처하는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의 인터뷰 기사가 슬쩍 나의 민감한 기억의 성감대를 건드렸을지 모른다. 그는 현실의 완전성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수의 가치라고 역설하였다. 현실의 완전성을 믿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을까. 막걸리 병을 자전거에 싣고 시골길을 달리는 대통령을 꿈꾸는 일은 현실의 완전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가, 혹은 아닌가. 현실이 이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너그러워야만 하는가.

얼마 전, 대통령 당선인이 보안이라는 말을 끄집어 낼 때 나는 내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21세기 모든 것이 공유되고 열려있는 시대에 보안이라는 말은 너무나 생경하다. 보안이라는 말에는 세상을 짓누르던 공포와 억압의 기억이 묻어있다.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고 잃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음습한 풍경. 보안이라는 말로 인해 나는 잃어버린 것은 낭만적이라고 하는 믿음에 원초적으로 배신당한 셈이다. 나는 차라리 낭만의 완전성을 매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기어코 낭만적이다. 기차역 삼등 대합실 긴 줄 뒤에 서서 땀 뻘뻘 흘리는 먼 나라의 국무총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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