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계승·문화 재건의 지름길은 ‘서도’이니라
전통 계승·문화 재건의 지름길은 ‘서도’이니라
  • 김영태
  • 승인 2019.03.25 21:1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예 선호 늘며 봉강서우회 번성
후진양성 집중에 서숙생 700명
이완재 등 많은 문하생에 사호도
사호설-1967
소헌선생의 일헌 이완재 사호설(1967). 만년필 친필로 그의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다.
 
소헌선생
1967년(60세) 서실에서 휘호하는 소헌선생.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13) 장년시절4. 1967(60세)~1968(61세)

◇서예의 대중화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선생도 장년기에 접어들었고, 선생의 선도활동도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서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가고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서예인구 또한 크게 늘어가면서 봉강서우회의 회원 수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봉강서우회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높아지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이같은 상승세 이면에는 경제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이 여가선용의 취미생활을 찾게 되고, 그 중에서 서도선호층이 두터워지게 된 영향이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도 서예가 대중화되고 서예인구가 크게 늘어난다는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 수가 지역에 줄잡아 8~9백명이 넘었다고 하였다.

대구일보 지면(1967.8.25)에는 「늘어가는 묵객인구(墨客人口)」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봉강서숙과 소헌 선생의 말을 소개했다. 「수적으로나 작가들의 활동면으로 보나 서울 다음 간다는 경북 서예계는 묵향지필(墨香紙筆)을 벗삼아 살아온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삼우당(三友堂) 김종석(金宗錫) 등 70여명의 재사(才士)들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까지 이들이 양성한 서숙생은 총 680여명이다. 이를 개별적으로 구분하면 죽농이 170여명, 소헌의 봉강서숙(鳳岡書堂)이 근 200명이고 김종석 씨의 삼우서재와 송석희, 박근술, 황기식 제씨가 각 20여명의 서숙생을 배출했다. 이밖에 이동현 씨의 경북서예원과 낙동서예원도 서숙생을 배출하고 있다」 라는 경북 도내의 서숙과 서예동호인의 현황 소개에 이어서 소헌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획(劃)과 운(運)에 따라 먹의 빛깔이 달라지는 서예, 거기엔 정적(靜的)인 선(線)의 예술 즉 동양 고유의 예술이 갖는 정적(靜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온 정력을 섬세한 붓 끝에 움직이면 모든 수심(愁心)과 잡념(雜念)이 없어지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이 서예야말로 정심(靜心) 정려(靜慮)의 ‘정신 통일’과 ‘인격 수양’에 가장 알맞은 취미생활이요 예술활동이다」 라는 기사와 함께 ‘봉강서숙에서 서예에 정열을 쏟고 있는 서숙생들’ 이란 제하의 사진을 게재하여 보도했다.

◇사호(賜號)

선생의 서실에는 늘 문하생으로 가득했다. 소헌 선생은 아무런 보수없이 지성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믿음과 심정서정(心正書正)의 철학은 제자들의 사호(賜號)로 이어졌다. 선생의 노트에는 문하의 제자들에게 사호한 「소헌작사문인서호(素軒作賜門人書號)명단(1967)」이 기록되어 있다. 소암(素菴), 매헌(梅軒), 백헌(栢軒), 일헌(一軒), 소우(素愚), 우송(友松), 사헌(斯軒), 소와(素窩), 모헌(慕軒), 소호(素湖), 소봉(素峰), 야헌(冶軒), 도헌(道軒), 만성(晩醒), 청하(淸霞), 창헌(昌軒), 우헌(友軒), 이헌(梨軒), 계헌(溪軒), 소산(素山), 연파(蓮坡), 계정(桂汀), 난심(蘭心), 난정(蘭汀), 난정(蘭庭), 계파(桂坡) 연서(蓮沼), 혜정(蕙汀), 혜련(蕙蓮). 두헌(杜軒), 소암(韶菴), 묵헌(墨軒), 소석(素石), 일산(一山) 이상 34인의 아호(雅號가 적혀 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제자들에게 사호가 이어졌다. 위(우측 혹은 좌측)의 사진은 선생이 정미년(1967)에 이완재(李完栽)교수에게 자필로 써 내려준 사호설(賜號說)이다. 그의 비망록에 만년필 친필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증(贈) 이완재사호설(李完栽賜號說)

일헌기(一軒紀)

일(一)은 數(수)의 시작이요 또한 數(수)의 전체이니 엣 성현이 전수해 주신 마음의 법(法)이다. 마음이 하나(一)이면 천하만물이 모두 혼잡되지 아니하여 하나(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것은 순일(純一)하고 거짓됨이 없어 그 쓰임이 다함이 없다. 천하의 이치는 모두 일(一)에 통합되어 쌓임을 다하고 그 큼을 다 하는 것이다. 이군(李君) 완재(完栽)는 본래 글(文翰)하는 가문에서 자라나 세상의 큰 기대가 있었다. 군(君)은 재주가 뛰어나고 기운이 호방하여 일찍이 철학을 공부하여 대학의 교수가 되고 또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뛰어난 기량을 가졌다. 일찍이 나를 좇아서 서예를 공부하니 이는 내가 나이가 많음이로다. 그러하나 겸허로 스스로를 키우고 서로 보고 도움을 주는 이익이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을 살펴볼 때 많은 사람들 허욕에 매몰되어 오직 일(一)의 뜻을 알지 못하고 도도히 흘러가는 흙탕물에 빠져서 돌아올 줄 모르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 오직 군(君)은 흙탕물을 벗어나 옛사람을 스승삼고 옛 도(道)를 행하여 항상 말하기를 오직 일(一)을 알면 천하 만사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음으로서 일자(一字)를 집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체험하고 들며 날며 보살펴 나아가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크게 발전이 될 것이다. 대체로 선비가 호를 가지는 것은 예로부터 훌륭한 덕행(德行)이 드러난 사람이 아니면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 호를 행하기를 마치 이름자 같이 대하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오직 군(君)은 옛것을 좋아하고 겸손하여 옛 원리대로 살려고 하니 또한 호를 행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헌(一軒)으로 호를 주어 그 행동을 권장하는 바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군(君)같은 사람은 오직 한사람이고 또한 나와 더불어 그 軒(헌)을 같이 하니 여생을 더불어 하나로 합치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 옛날에 집을 명명하는 것이 어떤 경우는 스스로 단점을 고치기 위해 자극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함을 위해서이다. 나는 군(君)이 그 능한 바에 바탕해서 더욱 노력하여 크게 발전하여 천하 후세의 오직 한사람(一人)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정미(1967)초여름 봉강우(鳳岡寓)에서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浩)가 짓고 아울러 써서 주다」

 

일제 잔재·서구 문명 범람 속
고유문화 정체성 정립 ‘심혈’
서도작품 7년간 국전 특입선
법고창신 바탕 완숙의 경지에

◇법고창신(法古創新)

196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해서 비로소 안정된 기반 위에서 전통론 내지 전통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60년대 이전의 혼란 상태가 극복되고 자주의식의 확립과 경제성장을 계기로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 재평가와 계승이 논의되기 시작됨으로 우리의 전통문제에 대한 정체성 논의가 대두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4·19와 5·16을 겪으면서 나라의 근간을 떠받쳐줄 투철한 민족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선생은 특히 정체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제의 잔재와 서구 물질문명의 범람으로 경시되어 가는 우리의 문화예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선생의 노트에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예술이었던 서도(書道)! 지금 이 시각 서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시간은 변화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문화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면서 흘러간다. 그러나 문화는 그 흐름 속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현금(現今)의 그 변화 속에서 우리의 문화가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다. 고유 문화로 유전(遺傳)되어 온 서도가 늪으로 빠지고 있다. 오늘날은 우리의 것을 찾아야겠다는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세계가 아무리 좁아지고 세계문화가 통합 융화되어 간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여야 한다. ‘나’를 잊어서는 안된다. 국민정신의 창조적 발현이 아쉬운 때이다. 우리는 지금 조상(祖上) 전래의 고유한 민족문화를 재흥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서도(書道)가 그 지름길이다. 서도는 언어문자(言語文字)로서 진(眞) 미(美) 선(善)이 그 핵심이다. 서도에는 모든 진리(眞理)가 함축되어 있으며 무형(無形)의 철학적 의미와 유형(有形)의 과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전통의 계승(繼承)과 문화 재건(再建)의 지름길은 서도인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즈음 전통을 지키려는 사명감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선생의 서도는 벌써 완숙의 경지에 와 있었다. 1968년에는 자기의 서체(書體)로 국전에 해서(楷書) 「애련설(愛連說)」을 출품해서 당선되었다. 연달아 7년간의 세월이 국전과의 인연으로 계속되어 온 셈이다.

매일신문 ‘가을구상‘ 탐방기사(1968.9.27)에서는 「인술(仁術)과 서도(書道)에서 삶의 보람을 찾아 온 서도가(書道家) 소헌 김만호 옹. 서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연의 심연같은 한약향(漢藥香)과 묵향(墨香)이 어울려 방문객의 온몸을 휩싸 감돈다. <중략> 일생을 묵향에 바쳐온 그의 작품은 가까이는 일본, 멀리는 미국, 프랑스, 독일에까지 시집가 우리문화를 자랑하고 있다」라고 선생의 활동을 알리고 연 7년간 국전 특입선의 경력소개에 이어 「그만큼 다양한 서체(書體)를 구사하는 서예가도 드물거니와 계속적인 출품의 성실함도 놀라운 것이다. 그는 머잖아 갖게될 개인전에는 문기(文氣)와 개성이 풍기는 역작(力作)을 전시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네의 고유하고 독특한 서도에의 전통을 지키면서 온고이지신(溫故而之新)으로 새출발하여 서도의 유현(幽玄)한 미지(未知)의 길을 끝까지 탐색하겠다고 했다. <후략> (毛)」라고 게재되어 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