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시골교회, 독립만세운동 선봉에 서다
조그만 시골교회, 독립만세운동 선봉에 서다
  • 배재욱
  • 승인 2019.02.17 2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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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기독교인들 주축으로
학생·농민 등 100여명 모여
쌍계교회 뒷산서 독립 운동
이후 안평면 등 전역에 확산
日, 옛 의성경찰서 건물서
독립운동가들 고문 일삼아
郡, 기념관으로 활용 예정
 

3ㆍ1 운동 100주년 배재욱의 대구ㆍ경북 역사기행 <3> 의성

대구와 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배위량(裵緯良, W.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세례를 준 김수영(金秀英)에 의하여 의성군 최초로(1900년 3월) 세워진 교회가 비봉교회이다. 비봉교회는 의성 지역의 모교회로 1902년에 이미 초가 4칸의 첫 예배당 건물을 지을 정도로 열심을 가졌다. 1949년 5월 와가 목조 건물로 132㎡ 크기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와가 목조 건물이 협소하여 그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72년 11월 30일 258㎡ 규모의 시멘트 벽돌 구조로 예배당을 건축했다. 2000년 3월에는 비봉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선교 100주년 기념비를 교회 정원에 세웠다. 의성 비봉 땅에 세워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의성읍과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쌍계교회는 1903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 세워진 교회로, 군위의 봉황교회에 다니던 김인옥, 이성준이 초가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마련해 3월 15일에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일제시대에 수난을 당한 교회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의 박영화 목사, 박영달 장로, 박영신 형제 등 신자들이 일제에 저항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세워진 교회에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공저 ‘국내 3·1운동Ⅱ: 남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0’은 의성에서 일어난 삼일 만세 운동의 발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성군 안평면 괴산동 장로교회 김원휘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려고 3월 3일에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때마침 평양에 3.1운동이 일어나 입학이 불가능하자 3월 6일에 귀향하였다. 그는 비안면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 박영화에게 만세시위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만세 시위를 촉구하고, 또 동월 10일 대구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안평면 괴산동 장로교회 박우완과 대구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 등이 여기에 가담하여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과 비안면 안평동 지역의 기독교도들과 함께 봉기한 데서 의성군의 만세시위는 발전해 가게 되었다.(박상동은 나중에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어 안동교회와 대구남산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그의 아들 박대선은 연세대 총장으로 활동했다.)"

의성 괴산교회 조사였던 김원휘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평양으로 갔지만, 평양에서 3월 3일에 일어난 대규모의 독립만세 시위를 목격했다. 그 여파로 평양신학교 입학이 좌절된 김원휘는 고향으로 돌아와 박영화 목사를 찾아가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소식을 전했다.

쌍계교회의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 유공자 박상동은 당시 대구의 계성학교 학생이었다. 그가 대구에서 3.8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쌍계교회의 목사로 활동했던 자기 아버지 박영화 목사에게 대구에서 일어난 3.8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소상히 전했다. 박상동보다 먼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3.1만세 운동의 여파로 평양 신학교 입학이 좌절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김원휘로부터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한 박영화는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 쌍계교회 신자인 박영달 장로, 박영신, 괴산교회 박우완 영수 등과 주축이 되어 1919년 3월 12일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거리와 비안초등학교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쌍계교회로부터 촉발된 만세운동은 이후 안평면 대사교회, 봉양면 도리원 등 의성 전역으로 확산됐다.

의성에서 일어난 3.1만세 운동은 비안면의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1919년 3월 12일 아침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100여명이 의성군 비안면 비안 공립보통학교에서 일으켰다. 그날 오후 1시에 비안면 기독교 신자들과 학생 100여명이 쌍계교회 뒷산에서 다시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의성에서의 3.1만세 운동은 의성 쌍계교회와 의성 괴산교회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 지역 학생들과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의성에 사는 한 지인은 의성의 겨울이 주변 지역보다 평균 5도 정도 낮아 “의성 마늘이 작지만 맵다”고 했다.

 

옛의성경찰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에게 잔인한 고문이 가해졌던 옛 의성경찰서 건물이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의성경찰서는 독립운동을 하거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을 고문하고 핍박한 대표적인 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897년 경남 웅천에서 태어난 소양 주기철 목사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후 고향에서 생활하며 웅천교회의 집사로 일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소명을 느껴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1926년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1931년) 평양 산정현교회(1936년)에서 목회를 했던 인물인데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순교자 주기철 목사도 의성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런 연유로 의성군은 옛 의성경찰서 건물을 활용하는 방안을 다양하게 연구한 후 옛 의성경찰서 건물을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활용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주기철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 목사로 일했는데, 의성에서 고문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다. 이 일은 1930년대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기독교농촌연구회’, 즉 ‘농우회’가 발단이 되었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농우회를 조직하여 각자의 고향에서 야학을 통하여 농촌 살리기를 운동을 했다. 이 농우회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38년 6월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유재기 목사, 정일영 목사, 오진문 장로 비롯해 농우회 활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청년들이 반일사상 혐의로 체포되어 탄압을 받았다. 이 일을 빌미삼아 신사참배를 거부를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교회를 핍박하는 과정에 주기철 목사가 의성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이런 연유로 의성경찰서 건물이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된 데 이어,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당시 희생된 인물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의성 중리교회의 권중하 전도사 등이었으며, 잔인한 고문과 핍박의 현장이 산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영남신학대 교수>



 

■대구경북 삼일운동 유적지 탐방행사

삼일절 100주년 대구경북지역 삼일운동 발생 지역 탐방 및 배위량길순례행사가 오는 26일부터 31일까지 열린다. 26일 오전 9시 대구제일교회 역사관에서 삼일절 100주년 기념 예배와 삼일절 학술대회를 가진 뒤, 구미, 안동, 포항 등 대구경북에서 삼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을 순회한다. 010-5812-0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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