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의서 읽고 밤엔 필사…한의학·서도 묵묵 정진
낮엔 의서 읽고 밤엔 필사…한의학·서도 묵묵 정진
  • 김영태
  • 승인 2018.11.1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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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부터 4년간 한의학 공부
22세 때 한약종상 시험 합격
이듬해 상주서 한약방 개업
이십대 후반 사회활동 관심
농촌진흥조합 대표직 활동
일제에 핍박받는 주민 위해
자력갱생회 조직 발전 도모
상주가천서당훈장
소헌 선생 17세(1924년) 때의 사진(훈장시절), 앞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소헌 선생.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4> 청년시절 1. 1925(18세)~1936(29세)

◇훈장생활

소헌 선생은 숟가락 쥐는 법과 붓 쥐는 방법을 동시에 배웠을 만큼 일찍부터 신동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7세 이전에 이미 서도와 한문 공부의 깊이를 위해 서숙 순회까지 할 정도로 공부는 이미 앞질러 있었다. 공부가 빨랐던 만큼 교육자의 길도 빨리 찾아왔다. 선생의 나이 17세(1924년) 되던 해 봄날에 상주 가장리(佳庄里)에 훈장으로 초빙된 것이다. 15세부터 17세까지 다녔던 과객 생활을 못마땅해 했던 아버지의 불호령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 근신 중이던 선생이 학문에만 집중할 때여서 아버지의 허락도 쾌히 받아낼 수 있었다. 훈장이 되어 집을 떠나 처음으로 서당에서 마을 학동 20여명을 가르치는 것은 선생으로서는 큰 보람이었다. 훈장이 된다는 것은 학불염(學不厭) 교불권(敎不倦)의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당시의 훈장이 선비의 표상이었을 뿐 아니라 공경의 대상이었으니 공부에 뜻을 세운 사람으로서는 학문의 산 하나를 넘은 것과 진배없었다. 그러나 보수는 형편이 좋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인지라 겨우 한사람 당 1년에 벼 한섬이 고작이었고 숙식도 서생들 집을 며칠씩 돌아가면서 해야 했다. 만 1년 동안 훈장을 마치고 돌아온 선생은 보수로 받은 벼를 팔아서 농지를 매입하여 살림에 보태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하였고 일제의 핍박은 더욱 가혹해져 갔다.

◇한의공부

부친은 소헌 선생의 공부를 높이 샀다. 그러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을 직감하면서 아들의 인생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친이 “과거시험도 폐지(1894)된 지 오래 되었고 나라도 잃고 세상이 하도 험악해져 가니 앞으로 너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된다. 나이도 찼으니 인제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아라.”고 일깨우고 “전망이 있는 인술(仁術)의 길이 어떻겠느냐?”며 의학공부를 권유했다. 아버지의 이 말은 새로운 세계로의 눈을 뜨게 하는 일깨움을 주었다. 선생은 마음속으로 한학과 서도에 정진할 수 있는 한편, 생활도 보장될 수 있는 한의(韓醫)의 길이 지금으로서는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오랫동안 한의로 인술을 펼 수 있었던 출발선이 됐다.

1925년 을축년 18세 때 선생은 상주 양촌에 있는 김병옥의원(金炳玉醫院) 댁에 숙식하면서 2년 동안 의서(醫書)를 독파하며 한의학의 원리를 익혀 나갔다. 다행이 그때까지 읽은 온갖 서적과 한문 독해 실력 덕분에 한의서를 익히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병옥 선생도 열성을 가지고 파고 드는 선생을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었고 자상하게 길을 인도해 주었다.

한의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비롯한 의학서에 이끌려 들어가면서 선생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많은 의학서를 배우고 익히면서 약을 짓고 만드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고 스스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밤늦게는 한의서를 필사(筆寫)해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주로 세필(細筆,잔글씨)을 많이 쓰게 되었다.

양촌에서 만 2년 동안의 한의학 공부는 일단 막을 내리고 1927년 정묘년 20세 때부터 상주의 조진구(趙珍九) 선생이 운영하는 경일의원(慶一醫院)에서 사상의학과 침구학을 실습하면서 한의학에 대한 임상경험을 쌓았다. 조진구 선생은 당시 침술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의였다. 소헌 선생은 조진구 선생의 지도 아래 수많은 침술 수련을 했다. 그뿐 아니라 약재로 쓰이는 약초들을 일일이 맛보고 효능을 실험하였다.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을 오랜 시간 관찰하여 기록하고, 닭을 잡아서 내장을 살펴 그림으로 도해를 만들었다. 마을에서 잔치 준비로 돼지를 잡을 때는 꼼작 않고 그 광경을 관찰하는데 몰두했다. 개구리 해부도 수없이 했다.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시간들이었다. 실로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 인체에서 우주의 원리가 체득되었다. 머리로만 익혔던 한학 지식이 실질적이고 기능적인 지혜로 바뀌어 지고 이에 따라 서도 또한 더 높은 경지에 닿은 것 같기도 했다.

4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1929년 22세 때 선생은 마침내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합격통지서를 받아 든 기쁨은 잠시 뿐이었고 그해 4월 10일 아버지가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자식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일제하의 곤경 속에서도 유가(儒家)의 가풍을 흐트리지 않으려고 애쓰시던 부친의 운명은 망극지통(罔極之痛) 바로 그것이었다.
 

격몽요결내용일부
소헌 선생이 23세 때 필사한 격몽요결 내용 일부.

당시 일제의 억압이 본격적이었던 때라 일제의 묘지령에 따라 유해를 공동묘지에 우선 모셨다가 나중에 시루덤 밑의 산을 구해서 일경의 눈을 피해 백형과 함께 한밤을 이용하여 이장하였다. 그 때의 심정을 선생의 비망록에는 ‘痛恨 痛哭 罔極’(통한 통곡 망극)이라 적혀져 있다. 그 엄청난 비통 속에서도 붓은 늘 먹에 젖어 있었고 붓글씨 만이 선생의 제일 큰 위안이었다. 이때 세필로 일주일 간 필사한 「격몽요결(擊夢要訣, 율곡 선생의 수고본)」은 아직도 소헌미술관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23세 때 쓴 잔글씨가 50년 후 지금 쓴 글씨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고 생시에 선생 스스로 제자들 앞에서 자랑삼아 웃으시곤 했다고 한다.

◇개업, 사회활동

한약종상 시험 합격후 1년 내에 개업하지 않으면 면허가 취소되는 당시 법령에 따라 선생은 1930년 을사년 23세에 부득이 상주 가천(佳川)에 점포를 얻어 개업을 하게 되었다. 그 해에 종두시술사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하지만 한약방으로 틀을 잡은 것은 1931년 무렵부터였다. 24세 때에 상주 청리면 원장리 시장에 제대로 갖춘 본격적인 약방을 이전 개업한 것이다. 시장에 처음 생긴 한약국이었다. 많은 환자들은 물론 한문학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 왔다. 주민들은 젊은 의원(醫員)을 한없이 믿음직스러워 했다. 생활은 자연히 안정되어 갔고 1933년(26세)에는 어머니의 회갑연을 벌이는 등 경사가 겹치는 나날을 지냈다. 한학과 서도에도 안정된 생활 기반위에서 정진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선생은 이 무렵부터 사회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에 의술(醫術) 못지않은 열성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28세(1935년) 때 농촌진흥조합장 직을 맡아 분주하게 뛰어 다녔는가 하면 다음해에 철도보호사고방지회장으로도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이해 3월에는 농촌진흥조합의 대표로서 전국을 순회하였다. 각 지역의 풍광과 아름다운 한반도의 경관은 청년 소헌의 안목을 크게 넓혀 주었다.

그러나 이웃 주변의 삶은 무척 어려웠다. 일제 치하의 억압으로 생활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고 주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지역주민 56명이 모여 매월 10원씩 저축하여 갱생하자는 취지로 모임을 만들었다. 이른바 ‘자력갱생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회장을 맡아 주민들의 삶의 용기를 북돋우는데 힘을 쏟았다. 이 소문이 국내 도처에 퍼져서 자력갱생회는 전국에 유명해졌다. 때마침 부인네들도 한 숟갈의 쌀을 모아서 저축하는 ‘부인절미조합생활개선회’를 결성했다. 선생은 절미조합 후원회장으로 열성을 다해 후원 활동을 하는 등 일제의 치욕스러운 압박 속에서도 지역 발전에 봉사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시기에 선생은 주변으로부터 아마 신뢰받는 모범 청년으로 칭송을 받았을 것이라 가히 짐작된다.

◇상전이 벽해되다

그러함에도 그 해는 태풍이 들어 닥쳤다. 이른바 1936년 병자대포락(丙子大浦落)이었다. 대홍수로 경계를 알수 없을 정도로 논과 밭을 비 바람이 함께 쓸어가 버렸다. 토지가 포락되어 하천이 된 것이다. 그 때의 홍수를 선생은 ‘대홍수로 桑田(상전,뽕나무밭)이 碧海(벽해,푸른바다)되다’ 라고 비망록에 기록해 놓았다. 전답은 물론 주택과 가재도구들이 송두리째 쓸려가 버리고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허허벌판으로 엄청나게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이럴 시기에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세계 제패를 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같은 민족의 올림픽 1등을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선생은 전국이 엄청난 수해로 고통받고 있는 시기에 일장기(日章旗)를 가슴에 단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에 울분을 토하면서 가슴아파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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