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고의장 만나 ‘한방법·동양의대’ 살렸다
박정희 최고의장 만나 ‘한방법·동양의대’ 살렸다
  • 김영태
  • 승인 2019.02.1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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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경북한의사협회장 당시
의료일원화·동양의대 폐쇄 추진
‘한의학 말살 재고’ 탄원서 작성
공로 인정 받아 중앙회장 표창
경복궁-경천사지십층석탑-소헌선생
1961년(54세) 경복궁 ‘경천사지 십층석탑’ 앞에 선 소헌선생. 이 석탑(국보86호)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0)-장년시절1. 1960(53세)~1961(54세)

소헌 김만호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였다. 구한말에 태어나서(1908) 유아기 때 경술 국치(1910)를 겪었고, 일제강점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년이 되어 해방(1945)을 맞이하고 광복이 되었지만 또 한 번의 혼란으로 동족상잔의 전쟁(1950)을 겪어야 했다. 당시 선생은 땅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사람들은 좌우(左右)로 분열되어 우리의 정체성이 혼돈되는 힘든 시대를 살고 있었다.

어려웠던 중년을 넘기고 선생의 나이 50을 넘긴 장년기는 대구 정착기였다. 40년간의 상주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이주(1953)한지가 어언 8년이 되는 때 선생은 장년기에 접어들었다. 1960년에 대봉동 언덕(鳳岡)에 터를 마련하고 소박한 집(素軒)을 지어 이전했다. 그때 선생은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의원도 의원이었지만 선생은 무엇보다도 2층 서실(書室)을 넓게 잡은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서실은 ‘참 나’, ‘참 정신’을 갈고 닦아 나갈 선방(禪房)이었기 때문이다. 새 날이 채 밝기도 전 여명 속에서 선생은 정갈히 한복을 입고 먹(墨)을 갈았다. 아련히 몸을 감싸고 도는 묵향을 심호흡하며 ‘서도란 무엇인가?’ 그 근원을 찾아 수도승과도 같이 선(禪)에 잠기었다.

“서(書)는 심화(心畵)이다. 자기의 마음을 그린 그림이다. 곧 자기 자신인 것이다. 왜 왕희지(王羲之)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했는가. 서예에는 철학과 과학 모든 학문의 총체요, 자연에의 조화가 깃들인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담고 있다. 그 진리는 참 인격자 만이 캘 수 있다. 옥(玉)은 갈아낼수록 빛나듯 뼈를 깎는 구도(求道)의 고통을 이겨내야만 그 과정(過程)에서 스스로 몸속에 든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서도(書道)는 진리의 광맥을 캐는 광부의 과정, 바로 그것이다. 끝없는 구도(求道)의 시련을 딛고 이겨나가는 데에서 참 진리의 새 지평이 열릴 것이다. 서도 그 유현(幽玄)한 미지의 길을 바로 응시하고 자형(字形)과 필력(筆力)을 바르게 하고 기르는 가운데 깊은 인격이 스스로 몸에서 생성되어 자라난다. 그리하여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원리가 자기 체내로 용해되고 응축되어 작품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스스로의 길을 다짐하면서 마음의 밭을 가는 경건함으로 화선지를 대하고 그 광대 무변한 순백의 세계에 그보다 더한 순수정신으로 한자 한자 서도의 새 길을 정립해 나갔다.

◇서실 개방, 지인들과의 교유

신축한 2층 서실은 서우(書友)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선생은 찾아오는 서우(書友)들에게 서실을 자유롭게 개방했다. 김세헌, 권혁택, 이수락, 여상기 선생이 찾아왔고 일족(一族)인 김봉조, 김진용, 김봉섭, 김 도, 김석환 제씨의 왕래가 많았다. 김정규, 이원세(무위당한의원) 선생 외 한의사들과 사업가 구수준, 양의사 권오석 제씨와의 만남이 잦아졌고 친목과 교유의 폭이 넓어졌다. 서울도 자주 왕래하였다.

지인들과의 교유는 서실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됐다. 선생은 서울 출장 중 틈을 내어 경복궁에 들러 지난해 복원한 ‘경천사지 10층석탑’을 들러 보았다. 이 석탑은 구한말 일본 궁내대신 다나까 미스아키(田中光顯)가 개성 경천사에 있던 탑을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한 것이다. 이를 반환하여 1960년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 복원한 국보(86호)이다. 빼앗겼던 우리의 문화재 앞에서 선 선생은 일제에 의해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훼손되었던 지난 시절의 감회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럴즈음 한의사협회 회원들과 부산 태종대와 합천 해인사, 진주 촉석루 등지를 다녀왔다.

1961년 4월 봄날 태종대에 올라 광활한 남해를 바라보며 아래의 시 한수를 읊었다.

「辛丑春 吟釜山太宗臺韻 (신축춘 음부산태종대운)

南風四月太宗臺 (남풍사월태종대)

遠客登臨眼割開 (원객등임안할개)

海景浮浮波上恢 (해경부부파상회)

山容古古石間苔 (산용고고석간태)

塵愁一滌胸襟爽 (진수일척흉금상)

盃酒三巡宇宙恢 (배주삼순우주회)

御駕河年親駐? (어가하년친주필)

前人己去後人來 (전인기거후인래)

素軒 (소헌)」

남쪽 바람 사월 태종대에 오르니 먼 나그네 시야가 활짝 열리는구나.

바다는 넘실넘실 파도에 흔들리고, 산 모습은 옛 모습대로 이끼 돋은 돌일세.

세속의 근심을 씻어내니 가슴속 후련하고, 술 몇잔 들고나니 세상이 온통 넓어졌구나.

그 옛날 임금님은 어느 해 오셨던고, 옛 사람 이내가고 뒷 사람이 왔는가 하노라.

◇또 다시 혼란, 5.16혁명(1961)

1960년대의 시작과 함께 정국은 또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4.19혁명(1960)으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과도정부(허정 외무부장관)의 총선거로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제2공화국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친 제2공화국은 또 한 번 혼란을 겪어야 했다.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으로 정국은 분열되고 혁신세력과 학생세력이 득세하여 민족자주화운동과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 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대학생들은 판문점에서 북한 학생과 평화통일을 위한 회담을 개최할려고 했다. 그야말로 또 다시 격동과 혼란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이윽고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혁명을 감행했다. 반공(反共)을 구호로 경제재건과 정치안정 및 사회개혁이 혁명공약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고 박정희 소장이 의장을 맡았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임에도 1961년은 한의사로서 보람된 해였다. 당시 소헌 선생은 경북한의사협회 회장이었다. 전국적으로 큰 문제로 대두된 한양방(韓洋方) 시비를 선두에 나서서 한방(韓方)의 승리로 이끌어 내었다. 선생은 그때의 과정을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양방(洋方) 측에서 한방법(韓方法)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자유당 정권과 장면 내각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양의사(洋醫師)가 일어나 한방(韓方)을 없애기로 운동하여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기까지 이르매 그 위험이 심각한 지라 한의사회 본회에서는 큰 힘을 못쓰고 주저없이 경북으로 이의 저지운동을 의뢰함으로 진정서를 작성하여 보냈으나 해결되지 못한채 5.16이 일어나고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다시 탄원서를 작성하여 김정규와 함께 상경하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독대하였다. 박정희 의장은 그 자리에서 탄원서와 상황 이야기를 듣고 원래 처리될 예정이었던 「국민의료법개정 및 동양의학대학폐쇄」의 건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한방법의 존속을 굳히고 동양의학대학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한의사협회 중앙회장으로부터 표창장이 있었다” 라고 적혀 있다.

어쩌면 한의학이 양의(洋醫)들의 의료일원화 주장으로 양방(洋方)에 흡수되어 사라질 위기에서 소헌 선생이 선두에 나서서 한방법의 존속과 한의사의 길을 살려내게 한 것은 한의학 발전의 큰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의료일원화반대 「탄원서」

당시 탄원서(歎願書)의 내용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단기 4294년 12월 일(1961.12.)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 경상북도회, 대구시 대봉동 12의16, 회장 김 만 호 인

국가재건최고회의장 각하

탄 원 서

1. 사건표시: 국민의료법 개정 및 동양의약대학 폐쇄에 관하여

2. 요지와 이유:

가. 국민의료법 개정안이 모든 절차를 갖추어 방금 최고회의의 심의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전문 중입니다. 물론 현실에 맞는 개정은 폐 협회원 일동도 느끼고 있고 또 대망(待望)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과거 이장정권(李張政權) 시절의 개정 운동에는 일부 몰지각한 양의(洋醫)들이 환자들을 독점하기 위하여 보사부와 국회 등 요로에의 자파 우세를 기화로 한의사제도를 말살 내지 격하하려는 책략에 좌우되었던 것이 사실이온데 구악을 일소하고 있는 혁명정부로서 그들의 불순에 현혹됨이 없으시리라고 믿으면서 만일의 경우를 염려치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한의학은 우리 민족의 유일하다고 할만한 문화유산이요 국민보건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인방들을 비롯하여 구미 여러나라에서도 연구 단계를 지나 임상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차제에 우리 조선(祖先)전래의 한의사제도가 일부 불순배의 책략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바입니다.

나. 금반 동양의학대학이 법규에 의해서 정비되었다고 하옵는바 이 대학은 한의사 육성의 유일한 기관이요 우리 민족 의학인 한의학의 전당인 것입니다.

법규에 의한 정비요 재건을 위한 폐쇄라고 볼 때 어디까지나 순응해야 할 것이오나 특수 학원 만은 특고의 대상이 되리라는 일념과 아울러 동양의학대학의 폐쇄와 재건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적에 동교 폐쇄로서 한의학 말살의 길이 되지 재건이 되지를 않는다고 보아집니다.

한의학이 우리민족의 보건 문화 경제에 공헌함이 있었고 또 현재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페쇄보다는 육성 보강함이 당연하다고 사료되는 바이오니 각하께서는 통찰 재고 있으실 줄 믿어 자에 탄원하나이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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