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고문에 심신 황폐해져도 놓지 않았던 서도의 끈
日 고문에 심신 황폐해져도 놓지 않았던 서도의 끈
  • 김영태
  • 승인 2018.11.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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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탈에 항거
전통문화 지킴이 ‘상산시회’ 조직
민족동화정책·창씨개명에 저항
글씨에 대한 갈망
첫 응모였던 오사카 서도전서 입선
국내 유일 공모전 ‘선전’ 준비 몰두

소헌 김만호의 예술 세계를 찾아서 <5> 청년시절2. 1937(30세)~1945(38세)

◇상산시회 조직

드디어 소헌 선생이 고대하던 한의사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1937년에 선생이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1936년 병자대포락(丙子大浦落)의 대홍수와 흉년의 와중이어서 더욱 값진 성과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30세였다. 그러나 합격 통지를 받은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월 23일에 어머니가 65세의 일기로 별세하셨기 때문이다. 9년 전 한약종상시험에 합격했을 당시 아버지가 운명하셨고 이번에 한의사시험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것이다. 선생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통함에 사로잡혔다. 지난날의 회한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항상 큰 기쁨이 있을 때마다 큰 슬픔도 함께 왔다. 21세 때 한약종상시험 합격과 함께 부친의 별세가 그러했고, 1939년 정축년의 경우도 한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채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모친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라고 소헌 선생은 당시를 회고했다.

모친의 유해는 일제 묘지령에 따라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가 그날 야간을 틈타 삼막골(三幕谷) 우실 쪽에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으로 정성 드려 모시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위기회(圍棋會)를 만들었다. 어머님의 별세라는 곤극(困極)을 붓으로만 달래던 선생에게 위기회는 위안처가 되었다. 위기회는 1938년 무인년에 이진교(李鎭敎) 선생을 회장으로 바둑 친목 모임으로 설립됐다. 소헌 선생은 부회장을 맡았다. 위기회 활동이 그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바둑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그의 시름은 차츰 잦아들어갔다.

선생은 내친김에 다음해인 1939년에 우리문화를 애호하고 지키자는데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시회(詩會)를 조직했다. 시회 이름은 상산시회(商山詩會)로 정하고, 선생이 회장을 맡았다. 한 달에 한 두 번 모임을 갖고, 서로 문답도 하고 시도 짓고 바둑도 즐기는 모임이었다. 그 때 선생의 시호(詩號)는 ‘시은(市隱), 만호(晩湖)’ 였다.

선생은 이후 지역 활동을 다방면으로 펼쳐 나갔다. 그 해에 선생이 수리장(水理長)으로 활동했는데 일본조두(日本組頭)의 부당함을 겪으며 민족적 울분을 통감했다. 1940년 33세 때 학교비평의원(學校費評議員)에 당선되었다. 1941년에는 소방조부조두(消防組副組頭)가 되었는데 당시 일인 조두의 횡포를 막아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상산시회는 회원이 늘고 계속 발전되어갔다. 그러나 이즈음 일인들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할려고 광분하던 때라 이 시회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온갖 방해와 협박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이 시기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문화예술을 억압하고 멸시했다. 역사와 전통을 왜곡시키고 우리의 선량한 풍습들을 열등한 미신으로 비하시키고 있었다. 청년 소헌은 이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감에 사로 잡혔다. 오히려 그것이 선생에게는 자극제가 되어 우리 것을 지킬려는 혼신의 노력으로 저항하였다.

◇창씨개명 항거

이윽고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했다. 학교수업을 일본어로 한 것은 물론이고 국사는 일본역사를 배우도록 했다.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誓)’를 외우게 하고 곳곳에 세워진 일본신사(日本神社)에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조선인은 일본인이다’ 라는 구호를 외치게 하고 강제로 서약하게 한 것이다.

이는 우리민족을 일본인화 하려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깡그리 해체하여 없애고자 한 것이다. 마침내 1940년에 우리의 성씨(姓氏)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왜경(倭警)을 비롯한 황민화운동을 추진하려는 친일어용단체 인사를 동원하여 창씨개명을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하고 불응자에 대해서는 비국민으로 매도하고 차별하였다. 우선 징용 대상이 되었고 식량 배급도 제외되는 등 많은 불이익을 주었다.

청년 소헌 선생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성(姓)을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과감히 반대하고 버티었다. 혈기 왕성했던 선생은 강압에 못 이기는 이웃들에게 자존심을 상기시키고 민족 주체성을 역설하면서 개명에 응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격려했다. 민족을 말살 하려고 미쳐 날뛰던 일제의 악랄한 압박 속에서 청년 소헌 선생은 이에 앞장서 항거하다가 일제가 만든 비국민법(非國民法)에 걸려 심한 형벌을 받았다. 심한 고문에 시달려 건강은 몹시 상해 있었다. 심신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이 때 선생의 나이 36세였다. 우리의 불행했던 한국근대사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를 준 치욕적인 역사였다.

◇서도전 작품 출품

이럴 즈음에 상주 청리지서(靑里支署) 주임으로 마쓰오까(松岡鐵藏)라는 50대 일인 경찰이 부임했다. 그는 서도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글씨도 잘 썼다. 늘 서도솜씨를 자랑하곤 하다가 선생을 만나고부터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글씨를 써와서 작품을 보이기도 하고 선생의 작품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 당시 일본 오사카(大阪)에서는 큰 서도전이 있었다. 1943년 36세 때에 선생은 마쓰오까 편으로 함께 작품을 출품하여 당당 입선하였다. 마쓰오까의 작품은 낙선되어 기가 죽었다고 한다. 첫 공모전에 입선된 셈인데, 처음 출품한 것이 입상되자 글씨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과 함께 새로운 용기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이론으로 서도를 깊이있게 연구해 보자는 의욕이 솟아올랐다.

“나는 아직 서도의 연구가 빈약하고 부족하다. 과연 글씨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서도의 참정신과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앞날의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서도를 지킴으로서 우리의 얼과 전통을 지켜 나갈 수는 없는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용솟음 쳤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열정으로 선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과 붓을 벗하여 시름하였다. 서도에 자신을 얻은 선생은 그 당시 유일한 공모전인 선전(鮮展)에 출품하려고 붓을 잡고 불같은 의욕으로 서도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1937)을 발발시켰고 마침내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과 동남아일대를 침략했다. 조선의 모든 자원과 사람들은 전쟁도구로 이용되었다. 이 전쟁에 많은 젊은 사람들이 학병으로 노동자로, 위안부로 강제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8·15 해방

선생의 나이 38세 때인 1945년, 드디어 고대마지 않던 해방이 찾아들었다. 미공군이 일본 본토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했고 소련의 만주공세작전으로 연합국이 승리한 것이다. 일본제국이 8월 15일날 항복함으로서 2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와 대만을 비롯한 모든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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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소헌 선생 38세 때 해방을 맞으면서 쓴 詩文(시문) 「해방기념운」

각고의 고난 속에서 드디어 광복이 되고 새 날이 열린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이 땅 어느 누가 기쁘지 않았겠냐만 청년시절을 겪은 소헌 선생의 감회는 실로 깊은 것이었다. 선생은 꿋꿋하게 우리의 것을 지키려고 했던 보람에 가슴이 벅차 마음껏 소리 질러 만세를 불렀다. 다음은 선생의 비망록에 적혀 있는 「解放紀念韻」(해방기념운)이다.

忽聞天威降玉樓 愁雲靜寂戰兵收 (홀문천위강옥루 수운정적전병수)

國運含寃庚戌世 史華明發乙酉秋 (국운함원경술세 사화명발을유추)

智事言論新世界 騷人歌舞舊風流 (지사언론신세계 소인가무구풍류)

幸得康衢烟月日 官民無事盈瀛洲 (행득강구연월일 관민무사영영주)

홀연히 듣건대 하늘의 위엄이 옥루에 내려와 전쟁을 거두고 피어오르던 시름을 가라 앉혔네

나라의 운세가 경술에는 원통함을 머금었고 을유가을에는 역사를 환하게 꽃 피우는구나

세상일을 알매 새로운 세계를 말하고 논하며,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춤추니 오래된 풍류로세

다행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왔으니, 나라와 백성이 무사히 영주에 가득차리라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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