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온의 민화이야기] 상복에 부착한 계급 ‘흉배’...작품 진위 결정하고 품계 짐작 돕는 ‘그림 열쇠’
[박승온의 민화이야기] 상복에 부착한 계급 ‘흉배’...작품 진위 결정하고 품계 짐작 돕는 ‘그림 열쇠’
  • 윤덕우
  • 승인 2023.08.0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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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에 착용 지속적 요구
1454년 첫 흉배 부착 단령 착용
제도 만들어 1품~3품 대상 적용
1745년 9품까지 착용 확대
문양 변경·크기 축소 등 정비
당시 양식 대한제국까지 유지
올 여름은 날씨도 덥고 개인전 준비로 휴가도 없이 하루하루 그림과의 결전의 날들이 보내고 있다. 잠시 짬을 낸다면 밤에 사극 드라마로 이 더위를 잊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극 드라마를 보면 배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병풍 그림과 주인공들이 입고 나오는 화려한 의상에 눈 호강으로 이 무더위를 잊어보려 한다.

드라마를 보다 그 화려한 의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것이 가슴에 붙어있는 흉배(胸背)인 것 같고, 또한 우리 민화와도 연관성이 있는 듯 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은 그 흉배 그림을 독자들께 소개해 보고자 한다.

흉배(胸背)는 왕과 관리들의 품계를 구별하기 위해 상복(常服: 관리들의 시무복) 등에 부착되는 표식으로 주로 문관은 조류(鳥類)를, 무관은 금수류(禽獸類)를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흉배 그림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옛 성인들의 초상화인데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과 흉배는 작품의 진위를 결정하거나, 그 인물의 품계(品階)를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초상화를 묘사할 때 표제와 함께 어떤 의복(衣服)과 관대(冠帶)를 착용했는지부터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들이다.

흉배의 착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 당나라 시대부터이고,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의하면 명나라의 흉배 제도는 1393년( 홍무 26)에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1607년에 간행된 <삼재도회(三才圖繪>를 보면 표현되는 동물이 품계에 따라 분리되거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청나라 시대에는 1690년에 간행된 <대청회전(大淸會典)>과 18세기의 <청회전도(淸會典圖)>를 통해 흉배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큰 틀은 유지한 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직후 명나라의 조정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도록 하였는데, 흉배는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기 위해 착용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각종 흉배를 갖고 들어왔고, 조선 내에서도 흉배 착용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단종 2년 1454년에 왕실 종친들에게 처음 흉배가 부착된 단령을 입게 하였고, 곧 문무 당상관은 모두 흉배를 부착하게 하였다. 그 이후 명의 제도를 따르되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따라 명의 3품이 사용하던 문양을 1품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때 제정된 흉배 제도는 1품에서 3품까지로 착용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쌍호흉배-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림1> 쌍호무늬흉배 견 22.3×20,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흉배제도는 문란해졌고, 이후 영조 21년(1745)<속대전(續大典)>에서 문관은 운학(雲鶴)과 백한, 무관은 호표(虎豹)와 웅비로 흉배 제도를 정비하였고, 3품까지만 사용하던 흉배를 9품까지 사용하도록 착용 범위 확대되었다. 18세기 말이 되면 흉배의 문양이 문관은 쌍학(雙鶴)과 단학(單鶴), 무관은 쌍호(雙虎)와 단호(單虎)로 바뀌게 되고 대한제국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청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낸것에 반해, 조선은 18세기에 나타난 독자적 양식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오되, 흉배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현존하는 자료 ‘오자치 초상화’
상반신 덮는 큰 황금 문양 눈길
구름·초목 배경에 호랑이·표범

경국대전 ‘호표문’ 기록과 동일


조선시대 흉배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존 자료는 적개공신(敵愾功臣)인 <전(傳) 오자치 초상화>가 가장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적개공신은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녹훈된 공신으로 오자치를 포함하여 모두 45명의 공신이 녹훈되었다.

〈전 오자치 초상〉은 오사모(烏紗帽)에 아청색(鴉靑色) 단령을 입고 공수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 좌상이다.
 

오자치초상화
<그림2> 전(傳) 오자치 초상화 1476년 작 102×160cm 견본 채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흉배는 황금색의 직금흉배(織金胸背)로 주인공의 상반신 대부분을 덮을 만큼 크다. 흉배는 구름문양(雲文)과 초목문(草木文)을 배경으로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와 점박이 무늬가 있는 표범이 마주 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형태의 외곽선을 그리지 않는 몰골법을 사용했다. 이 〈전 오자치 초상〉의 흉배가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의인 박씨 묘에서 출토된 실물흉배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실물 흉배에서 칠보문(七寶文)이 더 첨가되고, 초목문이 조금 변형된 것을 제외하고는 호랑이와 표범의 자세, 표현방법 등이 거의 같다. 이 실물 흉배가 중국에서 건너왔는지, 조선에서 만들어졌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호표문(虎豹文)이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오자치 초상의 흉배에 그려진 호랑이와 우리 민화의 호랑이를 비교해 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송도 호랑이의 포즈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흉배시리즈-태충명
작가미상 송호도 지본채색 86×86.5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머리는 몸과 반대쪽으로 돌아있는 상태에서 앞발은 일어서 있고, 뒷발은 앉아 있다. 앞다리는 서로 교차해서 내딛고, 뒷다리는 몸통에 가려져서 일부분만 묘사되어 있다. 몸통과 다리 등에는 두 개의 줄무늬가 1조를 이루면서 묘사되는 등 전체적으로 그 모습이 상당히 유사하다.

자료를 찾으면서 흉배가 먼저인지, 아니면 민화에 소재가 범용적으로 활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화가 단순히 집안을 장식화는 생활 장식화의 범주를 넘어서 다양하게 활용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래서 이러한 흉배 문양만 모아서 그린 현대 민화 작가를 소개한다.

문신과 무신 그리고 왕실에서 주로 사용한 흉배의 문양을 한자리에 모아 그 장식성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흉배시리즈-태충명
<그림3> 태충명 작 흉배시리즈 2021년 지본채색 각 33×29cm 6개 중 1개. 작가 소장.

전통이란 역사의 발전과정을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민족의 독특한 문화양식을 뜻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전통은 과거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보면 과거의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계승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드라마 한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나 시기도 하지만 흉배는 우리 선조들의 전통 사상을 느껴보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복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포함한 생활 전반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우리의 흉배는 중국의 것과는 다르게 우리의 그림패턴을 응용해 배치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도 크다고 생각한다.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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