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보통의 존재를 위한 찬가
[백정우의 줌인아웃] 보통의 존재를 위한 찬가
  • 백정우
  • 승인 2024.01.0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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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줌인아웃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틸컷.

스물세 살 스즈메. 평범한 부모 밑에서 평범한 외모로 태어나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후 평범하게 결혼한 가정주부다. 실제 성향도 어중간하다. 좋아하는 숫자는 6이고, 좋아하는 생선은 방어이며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반액이다. 이러니 공중화장실에선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버스정류장에서도 투명인간을 본 양 버스가 지나치기 일쑤다. 친구가 2시간이나 늦게 약속장소에 나타나는 건 다반사이다. 심지어 근무 차 외국에 나간 남편은 매일 전화를 걸어 거북이 안부만 묻는다. 스즈메의 존재를 아는 건 동네 개뿐이니, 정녕 평범한 게 문제인가.

남보다 특별해지기 위해 모두가 안간힘 쓰는 세상이다. 그런데 평범함이야말로 비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연히 ‘스파이 모집 광고’에 끌린 스즈메가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조직책 부부는 말한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한 거 아닐까?” 모름지기 스파이란 있는 듯 없는 듯 보통의 존재(‘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동네바보 동구로 숨어 지낸 북한 특수공작원 원류환을 기억하자)로 암약해야 하는 법. 어딜 봐도 튀는 구석 없고 어중간한 인생인 스즈메보다 더 스파이에 적합한 사람은 없을 터다. 반면 스즈메의 단짝친구 수자쿠의 일상은 늘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하다. 카메라맨으로 캄보디아에 갈 예정인 수자쿠는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 프랑스 남자와 사는 게 꿈이다(결국 에펠탑이 보이는 감방에서 프랑스 간수의 감시 하에 지낸다).

타인의 삶과 비교해 자기 인생이 평범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만 존재감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주위를 돌아보면 대다수가 보통의 존재이다. 이즈음 감독은 평범한 삶을 쉽게 봐선 안 된다며 속내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두부가게 아저씨도 스파이였고, 7년째 공원에서 마주치는 부랑자 할머니도 스파이였던 것. 압권은 스즈메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집 주인이다. 당연히 그도 스파이다. 라면집에 모인 스파이들의 대화는 어중간함의 끝을 보여준다. “라면을 맛있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야, 진짜 어려운 건 어중간한 맛을 내는 거지” 맛있다고 소문나서 손님이 많아지면 눈에 띌 테니 말이다.

살면서 모든 일에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일과 관계에도 선후와 경중이 나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까닭이다. 스즈메를 위로하던 수자쿠의 “평생 동안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해야 할 때는 그리 여러 번 오는 게 아니야”라는 말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누구도 내 존재에 관심 없다고 푸념한 스즈메지만, 그 역시 자기 이웃에 관심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두부가게 남자의 해외여행은 암살을 위한 임무수행이었고, 어중간한 라면 맛은 스파이란 사실이 발각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

황석영이 “누구에게나 인생에 절창은 하나씩 있다.”고 말했듯이, 평범하기만 한 인생이란 없다. 누구를 만나느냐, 혹은 어느 위치에서 상대를 보느냐에 따라 대상은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 한다. 스즈메가 우연히 발견한 스파이 모집광고를 통해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웃들을 만난 것처럼. 평범한 인생과 어중간한 삶을 위한 찬사와 반전. 지리멸렬한 인생들로 가득한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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