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이율곡과 맥아더
<대구논단>이율곡과 맥아더
  • 승인 2012.07.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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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필자는 스스로 생각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위인은 못되기에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위인 이야기를 적어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난다.

1971년 필자가 중등학교 역사교사 2년차를 맞았을 때 교무주임이던 R교사가 이율곡 선생을 `9도 장원’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내게 물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한성부와 8도(八道)가 있는데, 9도라니 어리둥절했다. 9도란 9도(九度), 곧 아홉 회를 말하며, 장원이란 과거수석 합격을 뜻한다.

이율곡 선생은 소과(小科) 대과(大科) 중시(重試)의 세 과거시험에서 각각 1차 2차 3차 도합 9회에 걸쳐 장원급제를 하여, 조선시대 과거합격자로 최고기록을 수립했다. 율곡은 조선 유일의 `9도(度) 장원공(壯元公)’의 빛나는 새 역사를 창조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대과, 무과, 잡과 합격자들은 임용에 앞서 호된 신고식이 가(加)해 졌는데, 신고식에도 예외가 있으니 장원급제자는 신고식 없이 바로 관직에 임명을 받았다. 이율곡은 초임에 호조좌랑(정6품)이 되었다. 갑과 2등, 3등은 정7품, 을과 합격자는 정8품, 병과 합격자는 정9품으로 성적에 따라 차등 임용이 되었다.

안목과 정치수완은 탁월하여 6조 판서를 다 거친 만능 행정가였지만, 정1품인 정승은 되지 못하고 종1품인 좌찬성이 되었다. 이 점은 이율곡 개인으로 보나 조선조정으로 보나 안타까움이 따를 것 같다. 여자가 중요한 것은 아기를 낳는 인재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이율곡 선생을 낳은 신사임당은 본명이 `인선’이었지만, 사임당이란 당호를 즐겨 썼다.

신사임당의 외모는 가문에 전래되는 초상화가 40여 년 전 발견 됐는데,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과는 거리가 먼 당신일 뿐이다. 미모라기보다는 얼굴이 메주짱 같은 사각형으로 건강미가 넘치는 촌부 타입이다. 사임당은 당시 여성으로 미덕이던 방적과는 담을 쌓고, 치마폭에 묵화를 치는 여성 화백이었다.

4군자 그림이 판을 치던 시대에 신사임당은 초충도, 수박그림을 그려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 주었다. 침선방적은 않고 시, 서화 등 예능에만 몰두했으니, 만약 사임당이 율곡을 낳지 못했다면, 현모 아닌 볼품없는 여성이란 비난을 받게 됐을 게다. 이율곡 같은 위인을 낳았기에 악처 아닌 현모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율곡은 현실주의자로, 대동법의 원조인 수미법, 곧 특산물 대신 쌀로 받자는 획기적인 세제개혁을 주장했다. 비록 율곡 생전에는 실시되지 못했지만, 사후인 광해군 때 이원익의 건의로 1차 실시를 보게 됐다.

율곡은 특히 일본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간파하고 `10만 양병설(養兵設)’을 주장 했다. 10만 양병의 근거는, 군사를 한성(서울)에 2만 명, 8도에 각 1만 명씩 도합 10만 양병을 주장했지만, 문약(文弱)에 빠진 무기력한 당시 조정에서 율곡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통할 리 없었다. 율곡은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살기 바쁜 세상에 일일이 다 알 것 없고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만 알아도 무던하다.

율곡은 임진강변에 `화석(花石)정’이란 정자를 지어 선조가 임진년 4월 그믐밤에 임진강을 도강할 때 화석정에 불을 질러 임금의 파천길을 밝히기도 했다. 율곡의 성리학이 일본열도에 상륙하지 못한 것은, 제자들도 스승처럼 정치적 센서가 뛰어나 임란 때 피란을 잘하여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율곡의 제자들도 더러 일본에 잡혀갔더라면, 일본에도 `율곡학’이 붐을 이루었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

요사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맥아더장군이라면, 6.25위난 속에 대한민국을 건져낸 은인으로 보다, 인천 만국공원에 세워진 이끼 낀 맥아더동상을 떠올리리라. 맥아더동상 목에 밧줄을 걸고 용쓰는 골수좌파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눈앞을 스칠 것이다. 맥아더장군이 이 땅에 왕림하지 않았다면, 분명 오늘의 세계지도에 대한민국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골수좌파들은 맥아더장군 때문에 적화통일을 못 이뤘다고 지금도 이빨을 맷돌처럼 갈고 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엿장수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의 뜻’임을 밝히 알아야 역사가 바로 보인다. 맥아더 동상에 밧줄을 걸고 끌어내리는 것은, 이 땅의 참된 국민이라면 배은망덕의 극치로 볼 것이다.

중도를 표방하는 정부에서는 맥아더장군 동상 훼손자들을 수수방관하고 있지만, 고맙게도 해병전우회에서 좌파 파괴자들로부터 사수(死守)하고 있다. 물에 빠져 다 죽어가는 화상을 건져주니, 보따리 찾아 달라고 호통 치는 격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명언이 있듯이, 한번 애국자는 영원한 애국자란 말을 생각해 본다.

이율곡 선생과 맥아더 장군은 시대와 국적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천재요 국가안보의 달인이요 민족의 은인이란 점이다. 이율곡 선생은 조선시대 최대의 천재요,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신화를 남긴 20세기의 군신(軍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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