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정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정권
  • 승인 2015.11.1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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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객원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참하다. 예로부터 약소국은 주위 열강의 위협을 받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다 견뎌내야 했다.

우리나라는 강국으로부터 침략과 침입의 대상국으로 지목되어 수없이 많은 외침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로인한 백성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수도 없다. 삼국시절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그리고 양만춘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오직 수성(守城)에 그쳤을 뿐 더 이상의 전진은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7년 대란을 끝마쳤지만 전국토의 피폐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진취적으로 개척할 수는 없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자위하면서 980여 차례에 걸친 외침을 이겨냈다고 자부심을 보여주지만 모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일 뿐 우리 민족의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일국의 왕이 오랑캐의 강요에 의해서 고두구배(叩頭九拜)의 예를 갖추고 사직을 지켜내는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은 약소국의 설움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당쟁으로 인한 끝없는 국론분열은 최소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양병론(養兵論)조차 무시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군비경쟁에서 뒤처진 것이다. 구한말 스스로 지켜낼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조선왕조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겨낸 저력으로 미국과 태프트 가쓰라 협정을 맺은 일본에게 먹혀야 했다.

이처럼 통째로 나라를 빼앗긴 민족도 별로 없다, 외국의 지배를 받은 나라는 많지만 일본의 식민정책은 세계사에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악독했다. 조선은 비록 군대의 힘은 약했지만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진 드물게 보는 문화국이었다.

일본에 문화를 전수(傳授)한 왕인박사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한글과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수천 년 내려온 개인의 성과 이름을 창씨개명(創氏改名)시켰다. 이런 식민정책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내선일체(內鮮一體)는 황국신민의 이름으로 학병과 공출 그리고 위안부 노동자를 끌어가기 위한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했다. 우리는 일본의 잔악한 통치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으나 미 쏘 양대 강국의 국제정치 논리에 휘둘려 결국 남북이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한심한 나라로 전락했다. 게다가 스탈린의 사주(使嗾)를 받은 김일성은 6·25남침을 감행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상잔의 참상을 빚었다. 김일성은 소련군대의 젊은 장교에 불과했으나 북한 통치를 책임지게 되었고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김정일이 뒤를 잇고 김정일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아직 30세도 안 된 새파란 젊은 아들이 3대째 세습을 이어가는 봉건왕조와 똑같은 모습을 시현하고 있다. 이들 김일성 일가에 대해서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1994년 김영삼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사망하여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는 남침을 자행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인물이다. 3년에 걸친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세계대전에 못지않은 큰 전쟁으로 변했다. 결국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휴전회담이 결실을 맺어 정전협정이 성립되고 오늘까지도 그 상태를 유지 중이다.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지휘하여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것처럼 널리 홍보하고 있으나 그 당시 16세에 불과한 소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과연 독립전쟁의 선구자가 될 만하였는지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김일성이 통치할 때까지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을 능가했다는 것이 통계에서 증명된다.

한국은 4·19혁명으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거대한 족적을 남겼으며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경제부흥에 집중하여 70년대에는 북한을 앞섰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북한과의 격차는 수십 배의 차이로 벌어졌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정권을 후계(後繼)했지만 이미 7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군권과 당권을 한 손에 쥔 지도자로 등장해있었다. 그는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지만 매우 잔혹하고 성급하여 주위를 어렵게 만들었다. 김정일이 김대중과의 정상회담을 수락할 때까지의 권모술수는 인공위성처럼 돌아가는 두뇌회전의 면모의 일단이다. 게다가 회담 하루 전에 일정을 변경하여 하루를 지체하게 만든 수단은 받아낼 것을 모두 받아낸 다음에야 회담을 할 수 있다는 김정일 나름의 확실한 계산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은 한 수 뒤졌지만 이 회담을 계기로 마련된 노벨평화상을 단독으로 수상하는 저력은 뒤졌던 한 수를 뒤엎는 노련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일은 노무현의 임기 말 또 한 번의 정상회담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가 뇌졸중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자 김정은이 뒤를 이었다.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외국유학을 한 사람으로 개방정책을 펼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도 많았지만 4년이 경과한 현재의 모습은 오직 정권유지에 혈안이 된 잔혹함만이 부각된다.

특히 제2위를 인정하지 않는 특성은 아직도 그의 정권이 불안정함을 보여준다. 장성택을 비롯한 최측근을 무더기로 숙청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김정은에게서 미래를 예측하는 경륜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3대세습의 지루한 역사가 이제 종지부를 찍을 시기가 당도하지 않았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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